개천에서 난 용

나의 개천 이야기 3 - 내부고뱔의 위험성

by 파도타기


5분만 대화하면 그 사람의 사생활을 다 알게 되는 사람이 있다. 참 바보 같은 사람이다. 헤어져 집에 돌아오면 후회하지만 누구에게라도 또 자신을 공개한다. 정직함에 대한 강박이다.

문제는 바로 내가 그렇다는 것이다.


"무슨 문제가 있니?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라."

중학교 2학년 때 시골 중학교에 어울리지 않는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며 대학을 갓 졸업한 영어선생님의 호출이다. 영어 선생은 목소리조차 나긋나긋하고 친절한 억양으로 서울에서 온 부잣집딸 같았다.

Ai로 본인이 작업한 이미지임

나의 영어성적은 늘 최하 95점이었다.

그런데 65점이 나온 것이다. 영어선생은 필시 집안에 큰일이 있어서 이런 변고가 생겼다고 믿었고 친절하게 나를 불러 상담하고자 한 것이다.

어디에 사는지 부모님은 무엇을 하시는지 형제관계는 어떤지.. 자세히 물었고 난 정직하게 모두 털어놓았다.


영어선생은 수업이 시작되면 10분 이상 숙제로 낸 영어교과서를 암기했는지 확인을 꼭 했다.

난 잘 보이고 싶었고 그래서 당연히 외어야 할 부분을 통째로 줄줄 외웠다. 덕분에 영어 성적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이번 시험에는 발음기호가 많이 나왔던 것 같다. 통째로 외우기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65점이 나왔을 뿐인데 선생은 내가 영어 실력이 우수한 학생으로 인식했나 보다.


그럴 땐 그저 침묵을 해도 좋았을 텐데... 난 왜 정직했을까?


내가 10살이 되던 해, 고향인 괴산의 시골에서 제천으로 온 이후 번듯한 주택을 사기까지 1~2년마다 이사를 한 듯하다.

Ai로 작업한 이미지로 시장가 분위기만 냈다.

당시는 서부시장에 살았다. 시장은 병맛골 피난민 수용소처럼 길게 이어진 건물이 역시 10 여동 넘게 있는 곳이다.

칸마다 반찬가게, 닭집, 옷가게 등이 난전에 늘어서 있는데, 시장의 외곽엔 벽돌로 칸을 막고 일반 사람들의 거쳐로 판매되었다.


우리 집 역시 그런 집 중 하나로 방이 두 칸이었고 함석 울타리에 달린 함석문을 열고 들어가면 좁은 마루가 있고 안방 앞에 연탄불이 있는 부엌이다. 거긴 그렇게 폭 1m 남짓의 마당이며 부엌이고 현관이었다. 동네엔 우물이 하나 있었고, 공중화장실은 시장 사람들과 함께 사용했다. 그래도 거긴 화장실이 여러 칸이라 병맛골보다 사정이 나았다.

사춘기가 시작된 나는 내 집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친구도 데려오지 않았고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다.


새벽이면 시장의 술꾼들이 소리 내어 욕지거리를 하며 싸웠고, 우리 집 함석울타리에 노상방뇨를 하기도 했다.

당시 아버지는 건축현장에서 콘크리트 작업을 맡아 일꾼들을 모아 작업하고 감독도 하는 십장이었다. 그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막장에 내몰린 사람이 많았고, 아버진 당신이 제천의 깡패들을 다 모아서 사람을 만들고 있다고 자랑하셨다. 그들에게 일을 시키고 돈을 벌게 해주는 것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 중 몇은 결혼까지 주선하고 주례도 해주셨다.


이 자랑스러운 일꾼들은 일단 노임이 늦으면 본색을 드러냈다. 돈을 달라고 밤마다 와서 함석문을 발로 차며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우린 너무 무서워서 잠도 못 자고 이불속에 웅크렸다.

아버진 언제나처럼 술고래가 되어 들어오셨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정폭력이 시작되었다.


물 떠와라, 재떨이 왜 안 비웠느냐?

왜 그리 행동이 굼뜨냐. 도대체 집구석에서 무얼 한 거냐?

끝없는 잔소리가 이어지다가 화가 나면 주변의 물건을 던졌다. 재떨이도 던지고 밥상도 엎고... 한 번은 가위를 던져 내 발등에 꽂혔다.

물건만 던지는 것이 아니다. 욕설과 폭력이 이어졌다. 아버지의 손은 크고 두꺼웠는데 뺨이나 머리를 맞으면 참 많이 아팠다.


남동생은 초등학교 4학년인 자신을 장작으로 때려서 가출했다가 갈 데가 없어 돌아왔다고 50이 넘은 나이에도 그 상처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술에 취해 자신의 아버지처럼 욕을 하고 소리 지른다.


누가 이 집을 알리고 싶었을까?

누가 이런 아버지를 알리고 싶었을까?

15살 꽃잎처럼 여린 소녀가...


영어는 그다음 날부터 절연해야 했다.

선생님이 자기를 다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분노하게 했다. 극도의 수치심은 그렇게 분노로 바뀌었고 수업 거부가 유일한 항의였다.

교과서를 꺼내지 않았고 외우기도 중지되었다. 깨끗한 책상을 바라보면서 눈에 힘을 주고 한 시간 내 버텼다. 덕분에... 막 시작된 나의 영어는 자라지 못했다.

영어 선생은 사실 우리 집을 본 적이 없고 상상할 수 조차 없었을 텐데...


지나친 친절은 결코 선이 아님을 난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그래서 교사가 된 이후, 또는 자녀를 키울 때 상대가 감추고 싶어 하는 일들은 묻지 않았다.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은 영혼을 파괴하는 일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직 강박은 절대 수정되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것, 또한 정직함을 가장한 내부고발이다.

그래서 쓰고 싶었던 글을 쓰지 못했으리라. 글이 진정성을 잃으면 생명이 없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어쩌면 세뇌되었으리라.


내부고발이 필수인 글쓰기, 그 위험성에 지금도 난 온몸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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