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천이야기 14 - 폭력의 사슬
제천에 오기 전까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기억이 없다. 오히려 할아버지, 아버지. 고모들과 함께 겨울 산에서 나무를 했던 추억이 동화처럼 아름다웠고 자랑스러웠다. 아버지와 그리 오래 살진 않았지만, 아버지의 순박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가 제천으로 이사하게 된 이유를 엄마는 제천에서 건축 일을 하는 아버지의 사촌 동생 때문이라고 했다.
내겐 당숙 아저씨인데 제천에서 병원이나 건물 등 집을 짓고 있었다.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지만 건축 전체를 맡아서 짓는 건축업자였다.
사촌 형인 우리 아버지한테 집과 땅을 팔아 제천으로 오라고 했고, 아버진 그 돈을 투자개념으로 아저씨한테 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얻은 직업이 콘크리트 부분을 맡는 것이었다. 이건 최근 엄마한테 들은 것이다.
예전에 나는 아버지가 친구한테 속았고 사기를 당해서 제천으로 오게 되었다고 믿었다.
아버진 당시 4, 5학년인 내게 콘크리트를 사용해야 할 곳의 부피를 구하게 했다.
깊이는 얼마고 가로와 세로 길이는 이렇다. 여기에 콘크리트 얼마를 넣어야 하느냐? 모레와 시멘트. 비율이 이런데 그럼 시멘트를 얼마나 사야 하느냐?
공부를 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계산을 시켜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고 싶으셨던 것이다.
훗날 아버지는 이 이야기를 종종 하면서 내가 기특하다고 자랑하시곤 했다.
집과 땅을 판돈을 모두 사촌동생에게 주었으니 우린 남의 집에 방한칸 얻어서 겨우 풀칠하며 살 수밖에 없었고 사촌동생한테 불편을 하소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일을 하면서 아버진 거칠어지고 술에 취했으며 절망적 언어를 쏟아냈다.
35살 아버지가 느낀 가장의 무게가 감당이 안된 까닭이었을까?
내가 도저히 너희를 먹여 살릴 수가 없으니 연탄불 피우고 다 같이 죽자
12살 어린애가 듣기엔 너무 잔혹했다.
당시는 통일교에서 어린아이들에게 다방이나 길거리에서 껌을 팔게 한다고 했다.
난 곧 부모님이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소녀가장이 되는데 나도 껌을 팔러 다니면서 동생들을 키울 수 있을까?
아버지의 부재보다 동생들을 키워야 하는 고민이 늘 나를 위협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노가다 현장을 떠났으나, 새로 맞이한 계급사회 학교 현장은 또다시 아버지를 절망하게 했다. 노비가 된 듯했을 것이다.
행정실장의 합리적이지 않는 지시는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으리라. 아버지는 명석했고 판단력이 뛰어났으며, 무학의 학력에도 중학생 딸에게 영어와 한자를 가르치셨고 수려한 문체로 글도 아주 잘 쓰셨다.
아버지의 합리적 문제해결 방안 제시는 무시되고 비웃음 당했으리라.
참을 수 없는 말단 신분의 비애가 술취하게 했고, 학교에서 비굴했던 자존감은 집에 오면 폭력이 되었으리라. 그래서 사표를 쓰겠다고 노래했으리라.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아버지는 자존감을 회복했다. "교감보다 우리가 더 부자다." 면서 자랑스레 말하는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러나 부모님을 모시면서 다시 폭력이 시작된 것이다. 고부관계, 조손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한 까닭이다.
또한 배우자에 대한 존중을 배우지 못했다.
병신 같은 게 뭘 안다고...
말끝마다 엄마한테 이렇게 말했고 억압하고 주눅 들게 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우리도 가족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힘에 의한 억압과 폭력이 가장 쉬웠다.
나도 아버지처럼 동생들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잘못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라 배운 까닭이다.
바로 아래 여동생이 잘못했다고 방구석에 아이를 몰아넣고 발로 마구 찼다. 어떤 잘못을 했는지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는데, 동생은 자신이 맞을 짓을 했다고 했다.
내가 모은 저금통에서 돈을 훔쳐서 만화가게에 갔고 그걸 들켜서 맞았단다.
맞을 짓이란 없다. 그게 어찌 맞을 짓이란 말인가!
피해자들이 자신의 상처를 약한 사람에게 투사하여 또 다른 피해자를 생산하는 것일 뿐.
내가 동생들에게 폭력을 멈춘 것은 그 사슬을 보았기 때문이다.
여동생이 이번엔 그 아래 동생에게 내가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아이를 밟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가슴이 뛰었다. 나는 멈추게 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너희도 그러지 말라고 했다. 거울치료였다.
사실 난 이 일을 잊은 적이 없다. 늘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오래된 일이고 , 동생이 11살 때 일이라 잊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처를 들춰서 다시 서로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난 단 한 번의 기억이 있는데 또 다른 여동생이 나한테 이불에 덮인 채 밟힘을 당했다고 나를 향해 가해자라고 항의했다. 난 위 사건 외에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방어했다.
실제 지금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바로 아래 동생한테 당한 것을 잘못 안 것이 아니냐고 하니, 분명히 내가 그랬다고 했다. 내가 15살이면 그 동생은 5살인데, 내가 5살 여동생을 그리했을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상식이 부재한 시절이었다.
동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
나도 아버지와 함께 가해자다.
이 글을 쓰고 나서 나는 한참 헐떡였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피해자로서의 상처보다 가해자가 된 수치심이 나를 더 힘들게 한다는 것을 처음 깨닫는다.
비판과 지적질은 쉽지만, 마주해야 할 나의 수치는 숨길 길이 없다.
그림은 두물머리 풍경 중 하나이다. 은퇴 후 거의 매일 이곳과 다산공원, 하남미사리 산책길을 다녀온다.
거거서 본 겨울을 나는 오리와 물닭 모습이 나처럼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