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촌스러움
너네 엄마가 결혼했을 때 살림을 얼마나 엉망으로 했는지 알아?
할머니와 내가 살림을 할 때는, 부엌에 먼지 하나 남기지 않았어.
가마솥뚜껑을 수없이 닦아 반짝반짝했지. 흙부뚜막, 나무선반 어디나 반들반들 매끄럽고 윤기가 났어.
하지만 네 엄마가 결혼하자마자 부엌은 엉망진창이 되었지.
솥뚜껑, 부뚜막, 선반까지 먼지가 소복했어. 할머니는 워낙 깔끔하신 분이라 너네 엄마한테 화를 많이 내셨지.
그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결국 내가 부엌일을 다시 맡게 되었고, 언니는 밭일을 하기로 했지.
너네 엄마는 밭일은 정말 잘했어. 마치 소 같았어. 하루 종일 일어날 줄 모르고 밭을 갈았고 손도 빨랐지.
작은아버지 장례식에서 만난 큰 고모는 우리 엄마의 신혼시절을 추억이라며 신나게 이야기했다.
아마 그랬을 거예요. 나는 바로 동의했다.
엄마는 결혼 후 온갖 시집살이를 다 했다고 불평하셨고, 시어머니와 시누이, 즉 큰고모가 엄마를 때리기까지 했다고 하소연하신 적이 있다.
큰고모가 펄쩍 뛰었다.
절대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으며 말도 안 된다고, 어찌 내가 언니를 때리겠냐? 우리 엄마 그런 사람 아니다. 손사래를 친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엄마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은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억척스럽게 일을 잘하고 생활력이 몹시 강하다.
제천에서도 쉬지 않고 바깥일 즉, 돈을 벌었다. 내가 국민학교 때는 학교 울타리 옆에서 복숭아나 과일을 큰 양동이에 담아 길가에서 팔았고, 빵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 양말이나 장갑 등을 시장 입구에서 팔았는데, 노점상을 단속하는 경찰이 오면 시장 속으로 리어카를 끌고 도망을 갔고 나도 리어카를 밀면서 부끄러운 도망에 합류했다.
아버지가 건축일을 할 땐 함바집을 운영하면서 국수를 팔았다.
방앗간을 운영하기 전에는 과수원에서 일을 하였다고 했다. 사과를 가득 실은 트럭 뒤켠에 매달려 퇴근하는데 날은 어둡고 트럭에서 떨어질 듯해서 많이 무서웠다고도 했다.
이렇게 바깥일엔 부끄럼도 없이 억척스럽게 일을 잘했지만, 집안일엔 많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집안 여기저기 주변을 닦아내고, 옷가지를 정리하며 살림을 야물게 해 본 적이 없다. 몸을 씻고 멋을 내고, 센스 있게 옷을 입는 일, 머리를 꾸미고, 자식을 씻기고 깔끔하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빗기는 일, 사춘기 딸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는 일...
그 모든 것에 무심했다.
그저 먹이기만 하면 부모 역할을 다했다고 믿었다.
왜 그랬냐고 항의하면 '내가 그럴 여유가 어딨었니? 사는데 정신이 없었는데'라고 하면 그만이다.
또 손님 대접이나 시댁 식구를 대하는 법도 몰랐고 시동생이 명절에 평생 닭 한 마리 가져온다고 흉을 봤다. 그 말이 들어갔는지 다음 해엔 돼지고기 한 근을 가져왔다고 웃으면서 이야기한다. 시댁 식구는 언제나 공격의 대상이었다.
나보다 겨우 두 살 위인 막내 고모는 괴산에서 우리 집에 오면 청소하기 바빴다고 했다.
쉬지 않고 청소하고 집안 정리를 하고 서랍에 빨래며 옷가지를 정리했단다.
명절엔 방앗간 일도 많이 도왔단다. 그런데도 고맙다고 말을 할 줄 몰랐고 차비도 주지 않았단다. 결혼할 때도 별 도움을 받은 게 없다고 40여 년이 지난 오늘에야 그 서운함을 토로한다.
막내고모의 말에도 동의한다.
나도 주덕 엄마집에 가면 일단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와 청소를 하고 화장실, 냉장고, 창틀 등을 땀을 뻘뻘 흘리며 닦아내며 일하다 왔다. 엄마는 딸이 왔으니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겠지만, 남편에게 창피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또 큰사위가 그렇게 장모를 위해 수고하고 애썼지만 고맙단 말을 하지 않으셨다. 당연히 할 일이라는 듯이...
매달 생활비 자동이체하는 것 외에도, 갈 때마다 10만 원 20만 원 용돈도 드리고 가까운 충주호수도 모시고 가서 구경을 시켜드리면, 아버지랑 다 왔던 곳이라면서 시큰둥했다.
오히려 막내 사위가 회를 사줘서 맛있게 먹었다면서 칭찬하고 사위에게 기름값 10만 원 줬다고 자랑한다.
너희보다 어려운 막내도 회를 사주는데 너희는 기껏 감자탕이냐는 나무람으로 들린다. 매사에 큰딸 큰사위한테는 만족하지 못한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 두 분을 모시고 제주도 4박 5일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네 아버지랑 다 왔던 곳이다. 그래서 볼 게 없다. 그때는 제주도에서 말도 탔다. 그뿐만 아니라 베트남도 가고, 중국도 가고, 백두산도 가는 여행을 많이 해서 별로 가고 싶은 곳이 없다고 말하며 시어머니한테 은근히 자랑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셔서 일만 해오신 시어머니로서는, 처음 온 제주도이고, 처음 비행기를 탄 것인데 그 행복감을 느낄 여유도 주지 않고 찬물을 붓는 일이었다. 시어머니는 엄마와 반대의 성정을 지니셨다. 그래요? 좋았겠어요. 웃으면서 호응하셨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남편은 내게 투덜댔다. 장모님은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느냐고, 말씀은 안 하지만 얼마나 속상하셨겠냐고... 그냥 "참 좋다, 사위 고생했다. 고맙다." 한 마디면 되는데 그걸 못하신다고. 나도 남편에게 엄마가 부끄러웠다.
난 엄마를 가르쳤다. 고맙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그런 거야?" 약간은 비웃듯이 말했다. 자식이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일 뿐 뭐 대단한 일 했다고 그러냐고 비꼬는 말이다.
요즘은 양평 두물머리 등으로 외출 후 요양원에 모셔다 드리면 '큰사위 고생했어. 고맙습니다.' 한다. 처음엔 장난처럼 말하면서 치사하지만 내가 인사를 해준다는 느낌이었으나 차츰 진짜로 고마운 눈치다.
엄마도 이 모든 일을 배운 적이 없었다.
엄마는 처녀시절 비누로 얼굴을 씻었다는 이유로 외할아버지 즉 엄마의 아버지한테 맞았다고 했다. 멋 부린다고, 연애를 하려고 그러느냐면서 때리셨단다. 야학에 갔다가도 같은 이유로 맞았단다.
그래서 문맹이었는데, 초등학교 1학년 우리 둘째 아들에게 한글을 배웠고 지금은 글을 잘 읽는다.
글도 모르고, 집안일도 잘 못하고, 자식도 잘 가르치지 못하는 교양 없는 우리 엄마, 아버지는 그래서 더 무시하고 함부로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무시하고 함부로 해야 할 합리적 이유가 되는가! ' 여자답다'가 부인의 평가 기준이던 봉건 시대 이야기다.
자식들도 이런 엄마가 창피했다.
학교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엄마도 자신의 촌스러운 모습이 부끄럽고 용기가 나지 않아 학교를 찾지 않았다고 했다.
회사에 취직하여 서울로 와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참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화장을 하기는커녕 로션도 바르지 않았고, 옷도 잘 고르지 못했다.
처음 서울로 와서 둘째 고모와 함께 살았는데 고모는 언제나 세련되고 멋있었다. 고모의 옷을 빌려 입고 회사에 출근하니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어떤 직원이 '이 맘 때는 어떤 옷을 입어도 예쁘다'라고 칭찬인지 헷갈리는 말을 했다
예쁘다에 방점이 있는지 아무래도 자기 옷이 아닌 것을 눈치챈 것인지 알 수없다.
나는 고모의 옷은 언제나 멋있다고 생각했고 고모처럼 옷을 입고 싶었다.
서울 생활을 하면서 내가 얼마나 교양이 없는지 깨달았다. 입을 벌리지 않고 오물오물 음식을 먹는 법, 곱게 말하는 법, 예의 바르게 앉는 일, 바르게 걷는 일 몸을 자주 씻고 관리하는 법 등 여자 아이가 자라면서 엄마에게 마땅히 배우는 어떤 예절도 배운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스스로 가르치고 배웠다.
부모는 이때부터 부끄러운 존재였다.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와 무지하고 촌스러운, 돈만 억척스럽게 버는 엄마는 나의 결혼과 배우자 선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 by 파도타기 '두물머리 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