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육아

미안해, 아들

by 파도타기

몇 년 전 주덕에 혼자 사시는 친정엄마와 단둘이 2박 3일 여행을 했다.


서울에서 주덕으로 가서 엄마를 모시고 다시 평창으로 갔다. 큰아들의 세컨드 하우스가 거기 있었다.

엄마는 딸과 단둘이 가는 여행에 들뜨셨다.


운전을 하면서 그동안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엄마 내가 어릴 때 외갓집에서 살았잖아, 왜 그랬어요?

내가 기억하는 때는 5,6세 어느 지점에 외갓집에서 잠시 머물렀던 것 같다. 거기서 외사촌들과 놀던 기억이 나서 물었는데 엄마는 내 유아기를 이야기하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림: by파도타기 <내 방의 천연가습기>

너 애기 때, 내가 널 업고 다니면서 시골 동네를 다 돌면서 장사를 했잖아. 잡화상에서 실, 바늘, 장갑, 양말, 그릇, 온갖 물건을 사서 큰 다라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이집저집 팔러 다녔어.

넌 땡볕에 하루 종일 다니느라 축 늘어져서 잠을 자기도 했고, 울지도 않았지.

어느 집에 들어가면 점심을 먹다가


"아이고 애 좀 내려놓고 젖이라도 좀 물려요."


하며 먹을 것을 줘서 얻어먹고 젖도 주고 그랬어.

돈이 없던 시대라 물건을 팔고 쌀, 보리, 조, 수수, 콩 등 곡식으로 받아 왔어. 돌아올 땐 그게 더 무거워서 고생이었지.


어떤 날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와 보시고, 애는 축 늘어졌지, 땀은 쏟아지지, 머리에 짐은 산더미지, 너무 고생한다고 널 외갓집에 맡기라 해서 외갓집으로 가게 되었지 뭐.


젖먹이였던 나는 그렇게 땡볕에 축 늘어져서, 엄마 등에 업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리며, 하루 종일 시골길을 다녔구나.

축 늘어진 어린 아기, 배가 고파 울지도 못하는 나의 아기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속이 상하고 눈물이 났다.


또 다른 이야기는 아버지는 장사를 한다며 집을 나갔고, 혼자 괴산 시내 음식점에서 설거지를 하며 밥을 얻어먹었는데, 2.3살 어린 나는 설거지하는 엄마 옆에 쪼그리고 앉아 울지도 않고 혼자 잘 놀았단다.

이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이다.

아버지는 장사를 한다면서 나가서 소식이 없고, 시집살이는 고되고, 엄마는 그렇게 외갓집과 가까운 연풍에 방 한 칸을 얻어 장사를 하면서 살기도 했고 식당방에서 아기를 키우기도 했다. 20대 새댁의 고단한 삶이었다.


엄마는 오직 당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만 이야기했다.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전혀 상상하지 않았다.


나의 울지도 못한 꼬마가 아직까지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울고 있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을 때 늘 아기꿈을 꾼 것일까? 꿈속에선 늘 두세 살 아들을 잃기도 하고 아들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 난 애써 아이를 찾아다니고 구하기 위해 애쓰다 깨어난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악몽에 시달린 날엔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몸살 기운이 있다. 몸이 아프려고 이런 꿈을 또 꾸었구나,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내 아들에게 좋은 환경으로 키우지 못한 미안함 때문에 그런 것이라 해석했다.


2박 3일 동안 엄마와 같이 있으면서, 내가 결혼초에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처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결혼 생활 중에 어려움을 거의 이야기한 적이 없다.


누가 그런 집에 시집가랬어?

그런 말이 곧바로 나올 것이라 생각해서 자존심이 상했다.


대학 4학년에 큰애를 낳고 휴학을 했다.

남편은 가장이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는지 대학 졸업 후 전도사 자리를 구했고 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경기도 어느 지역에 교회에서 시골집을 얻어 주었는데 방이 2개 있고 마루와 넓은 마당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 흑석동 꼭대기 신혼방은 시골에서 자취하던 고등학생 시누이들이 올라왔고, 시어머니는 돈을 더 보태서 낮은 곳으로 이사하여 함께 살았다.


전도사 월급은 20만 원이었는데, 당시 남편은 석사과정을 하는 대학원생이기도 했다.

감사헌금, 십일조, 교통비, 책값, 학비까지 부담하면 생활비는 거의 없었다.

늘 김치찌개에 두부나 콩나물을 넣어서 밥을 말아먹었던 것 같다. 쌀은 교회에서 성미로 거둔 것을 주었고, 김장 김치를 한 통 주었다. 고기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우유 살 돈이 없어 아이에게 우유도 못 먹였다. 나 역시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성이 차지 않은 아들이 하루 종일 젖을 빨아대니 나중에는 피가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떡이 쌓였는데' 했다고 말하니, 엄마도 그제야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면서 속상해하셨다.


말을 해야 알지. 집에 떡이 남아돌았는데 가져다 먹지.


방앗간에 떡을 하러 오는 사람들은 제천시 외곽의 작은 동네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버스로 명절이나 큰일이 있을 때 두말씩 떡을 해갔다. 백설기, 팥고물이나 콩고물을 켜켜이 넣은 찹쌀떡, 떡국용 가래떡, 등. 엄마는 떡을 해서 머리에 이고 버스정류장까지 가져다주었다. 손님들은 대게 단골이었고 수고비의 두 배나 되는 떡을 나눠주고 갔다. 그래서 우리 집엔 온갖 떡이 많았다.

당신의 책임이 배제된 이야기에는 공감을 하고, 혹시라도 딸이 원망을 하려는 지점에서는 당신의 고생을 강조하며 방어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 당신이 고생한 것이며, '그래도 널 키우느라 온갖 고생을 다했다'가 요점이다.


나는 어린 내가 애처로웠고, 부모님의 따스한 관심과 보살핌이 부족해 힘들었다고 공감해 주길 바랐지만 서로 자기 슬픔에서 한 발도 양보하지 않았다.


살아보니 나도 아들과 같은 대화를 하고 있다.

아들은 자기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길 원하는데,


나는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죄도 없는 아이에게 죄책감까지 심어주는 것이 아닌가!


나도 엄마를 닮은 것일까?


아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또 얼마나 상처를 받을까.

우유도 못 먹고 배가 고파 하루 종일 엄마젖을 물고 살았구나! 그래서 내가 성인이 되어도 늘 허기진 삶을 살고 있는 것이구나!


요즘 둘째 아들네 돌도 안된 손녀딸을 가끔 본다.


엄마, 우리 이쁜이가 사랑을 충분히 받아서 짜증 한번 안 내고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어요, 그렇지요?

하며 딸을 안고 얼른다.


손녀는 이유식으로 한우를 갈아서 익힌 것, 고구마, 당근, 오이, 버섯, 브로콜리 등 각종채소 다져서 익힌 것과 귀리 죽밥을 함께 먹이고 우유를 또 먹인다, 간식으로는 배나 사과, 딸기를 또 준다. 한 공기도 넘을 이유식을 다 먹은 손녀는 하루 종일 짜증 한번 없이 웃으며 잘 논다. 평화롭고 행복한 표정이다. 아파서 병원에 간 일도 없다. 큰아들처럼 둘째도 철저한 위생과 따스하고 안전한 돌봄으로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난 참 부끄러운 부모가 된다.

이렇게 키웠어야 했는데..


아들들이 직장이나 가정, 관계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다 내 탓 같아서 속상하고 미안하다.


난 내가 아주 좋은 부모인 줄 알았다. 누구에게 자랑해도 빠지지 않는 멋진 아들들로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들들의 무진 노력 때문이다.

내가 나의 삶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노력했듯이...


아들들 , 미안해. 준비도 없이 너희를 낳았어.

그래서 잘 키우지 못했어. 그래도 잘 성장해서 좋은 어른이 되어주어 고마워.

덕분에 우린 좋은 가정을 이루었고, 난 내가 꿈꾸는 모든 꿈을 이루었단다.


엄마보다 나은 부모인 너희 모습을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렇게 늘 좋은 부모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