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일기

선물 같은 휴식

by 파도타기



대학을 휴학하고 전도사 사모(목회자 부인을 사모라고 칭한다)로 집에서 아들하고 하루 종일 있었던 12개월은 실제로는 휴식이었으며 선물이었다.

17세에 서점 점원이 되어 새벽부터 밤늦은 시각까지 일했다. 출근과 동시에 하는 일은 청소였는데 펌프질을 해서 물을 받고 걸레를 빨아서 청소를 했다. 1월에 처음 출근했으니 얼마나 물이 차갑고 손이 시렸겠는가? 언 손을 녹이려 가게 안 연탄난로에 손을 녹였다. 그러다 동상 걸린다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며칠이 안 되어 동상이 걸렸고 , 열 손가락이 벌겋게 마디마다 퉁퉁 부었다. 새책이 오면 책꽂이와 가판대에 책을 정리해야 한다. 새책은 표지에 하얀 돌가루가 묻어있었다. 그래서 손등이 거칠어지고 피부가 터지기도 했다.

엄마가 아는 치료방법은 민간요법뿐이다. 약을 산다거나 병원에 데려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일이 없을 것이다. 약국이나 병원은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마늘대를 삶은 물에 담그기,
콩자루를 겨울밤에 밖에 두었다가 언 콩자루에 손을 넣기, 세숫대야에 물을 넣고 아직 덜 꺼진 연탄불을 넣어 연기가 솟아오르면 그 물에 넣기...
물론 어떤 효과도 없었다.

구정이 되어 괴산 할아버지댁에 갔다. 시골엔 침놓는 할아버지가 꼭 계신다. 한의사 자격증은 없지만, 항상 침이 든 지갑 같은 것을 지니고 다니셨다. 그 할아버지께 데려갔나 보다. 그 침술 할아버지는 10cm 이상 되는 장침으로 여기저기 침을 놓는다.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침을 놓았고, 열 손가락 마디마다 침을 놓았다. 손마디에서 피가 한 방울씩 나왔다.
침술 할아버지는 명의였다. 동상이 다 나았다.

그러나 부기는 조금 빠졌지만 살이 되었다. 손가락도 조금 휘었다. 내 손은 또 나의 콤플렉스가 된다. 가늘고 고운 야리야리한 손가락이면 얼마나 좋을까?

서점일은 동상이 아니어도 평생 아픔으로 남았다. 내 월급은 1만 원, 우리 반 반장을 했던 내 친구는 세무서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며 2만 5천 원을 받는단다. 비슷한 말단인데...
나보다 많이 받는 친구가 가장 부러웠던 시절이다.
나도 그렇게 받았으면 고등학교를 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이후 대기업도 만만치 않다. S생명 기획관리과는 S그룹의 은행역할을 하는 창구다. 1978년 당시는 계열회사가 28개 정도였다. 그 계열회사에 자금을 빌려주는 일도 거기서 한다.
내가 하는 일은 그 S생명의 회계, 주로 예산 결산 관련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나 계열회사의 대출금 등의 서류 작성에 필요한 계산과 확인이었다.
나는 숫자만 가득한 서류를 보면서 수판으로 더하고 빼고 하면서 합계를 맞춰야 했다.
서류는 끝자리가 1억이다. 그런데 끝자리가 8이 틀린다. 어디선가 잃어버린 8억을 찾아내야 한다. 8억, 난 1억이 얼마나 큰돈인지 상상해 본 적도 없다. 그냥 계산상 수일뿐, 그런데 8억이라니... 그걸 내가 물어내야 한다면? 아찔했다. 결국 선배언니가 찾아냈다. 내가 9를 1로 보고 계산한 것이다. 당시는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수를 썼다. 지금도 8억을 잃은 그 떨림을 잊을 수가 없다.


대입 입시는 또 얼마나 피를 말렸는.
몸속의 수분 90%를 피 한 방울로 응축하는 몰입도를 요구했다. 난 혼자 도서관에서 한 달, 단과학원을 3개월 15일 다녔다. 1980년과 1982년 두 번에 걸쳐 학습기간은 각 4개월이었다.


5 공당시 대학을 입학한 81학번 이후 우리 대학에는 나처럼 실업계고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학생 중에는 나처럼 임산부 학생도 여럿 되었다. 나와 친분이 있던 남녀 늦깎이 대학생들은 훗날 장학사, 교장 등 관리자가 된 사람이 많다.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사회, 정치, 교육제도가 개인의 기회를 바꾼다는 것을 실감했다.

교육대학을 입학하니 또 쉽지 않다. 상업학교를 나온 탓에 동기들보다 여러 면에서 부족하고 힘들었다.
물리는 아무리 집중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문과는 사회영역 전체가 시험과목이었으나 과학은 한 과목만 선택이었고, 난 생물을 선택했다. 물리는 중학교 이후 배운 일이 없었다. 또한 피아노 실기는 늘 턱걸이로 통과해야 했다. 영어는 더 큰 문제였다.

정치사회가 격변하는 시기, 5 공시절엔 대학입시 제도도 바뀌었고, 덕분에 영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2외국어를 영어 대신 볼 수 있었다. 나는 변혁의 틈을 운 좋게 통과했다. 회사 다니면서 1년간 배운 일본어회화가 도움이 되었다. 영어로는 절대 불가능한 점수를 획득했다. 단 1개 틀렸다. 그러나 대학에서 일본어는 다루지 않는다. 영어는 그래서 가장 큰 벽이었다.

사회에 나온 17살부터 10년간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듯 헉헉거리며 살았다는 생각을 했고 언제나 경제적 어려움은 무엇도 차분히 할 수 없게 했다. 그림도, 글도... 늘 아르바이트에 쫓겼고, 그래도 대학생활을 즐기고도 싶었다.
미팅도 하고, 동아리활동도 하고, 소개팅으로 데이트도 했다.

그러다 결혼을 했고 28살, 아기엄마가 되었다.
내가 대학에 입학 한 때는 25살이었다.

갑자기 아무도 내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았다. 출근이나 출석도 하지 않아도 되고, 과제와 시험도 없다.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 를 움츠러들게 하는 손님도 없다. 서운 상사도 없고, 나이 어린 선배의 갑질도 없다. 경쟁도 없고 갈등도 없다.

참 야릇하게 해방감이 들었다.

하늘이 내게 준 휴식시간이었다. 단지 너무 가난하여 먹을 것이 부족했지만, 늘 가난했던 난 별 어려움이 없다. 아기에게 풍족하게 젖을 먹일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24시간 아기와 함께 잠을 잤다. 낮에도 자고 밤에도 자고...
10년간, 아니 27년 간의 내 삶이 너무 고단해서 쉬고 싶었을 것이다.
근처에 사시는 윤집사님이 몰래 우리 집에 들러서 부엌에 담가둔 아기 기저귀를 모두 빨아서 마당에 널고 가시곤 했다.

제가 사모님 주무실 때만 하필 가나 봐요.

그게 아니고요, 언제나 제가 잠들어 있는 거예요.

나는 그 착한 윤집사님께 웃으면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시간들은 나를 너무 행복하게 했다.

24시간 나와 뒹굴던 그 첫째 아들이 육아휴직을 했다. 나를 닮은 아들도 삶의 매 순간 허덕거렸을 것이다.
휴직한 아들이 그때의 나처럼 휴식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선물 같은 휴식이기를...

by 파도타기 <촛불 안시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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