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키다리아저씨

나의 키다리아저씨 아들이 한동훈?

by 파도타기

나의 키다리아저씨 아들이 한동훈?
나는 믿을 수 없어서 네이버 나무위키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맞단다. 영화이야기가 아니다.

진웹스터의 작품 키다리아저씨를 읽은 것은 아마 고1 때일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게도 키다리아저씨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학금을 주고 내게 아버지나 오빠, 삼촌 같은, 관심과 사랑을 주는 후원자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청주 AMK공장 공장장이 장학금을 주는 장학생으로 추천받았다. 꿈을 꾸면 이루어진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1년 동안 장학금을 받았다.


장학금도 좋지만, 내게 후원자가 생긴 것이다. 키다리아저씨라고 생각했다. 나를 전적으로 응원해 줄 사람이다. 화내고 꾸중하고, 딸의 요구에 매정하게 거절하는 아버지가 아니다. 이유도 목적도 묻지 않고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나도 책 속의 주인공 '주디'가 진짜로 되었다.

나의 키다리아저씨는 당시 경양식 식당에서 함박스테이크를 사주기도 했다.

처음 가본 곳이고,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다.

약간은 어두운 듯한 고급진 식당, 들어가면서부터 심장은 떨리고,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고요한 식당의 손님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함박스테이크, 나는 이름만 들어도 당시의 떨리는 그 순간들과 맛을 추억한다. 수제함박스테이크를 지금도 그래서 좋아한다. 나의 그런 모습을 남편은 이해 못 한다. 그저 아내를 위해 분위기를 맞추려 애쓴다.


당시 그분은 40대 정도였을 것이다. 아들딸과 사모님이 서울에 사는 것 같았다. 사모님을 한번 뵌 듯도 하다. 나를 장학생으로 소개했다. 가볍게 스친 만남이다. 세련되고 지적 이미지가 느껴지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이었다.

나는 '키다리아저씨'를 읽었던 터라 그분께 종종 학교생활을 편지로 보고하기도 했다. '키다리아저씨'처럼 답장은 하지 않았다.

졸업식 땐 오셔서 함께 사진도 찍었다.
딱 한번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졸업 때인지 연하장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서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자랑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연락처가 없다. 찾기엔 너무 늦었다.
그래도 잊지 않았고 가끔 생각이 났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나서 적극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편지 받은 것이 기억나서 보관된 옛 서류들을 뒤지다가 대학시절 수첩을 찾았다. 주소록에 한명수 AMK공장장이 나온다. 대학 시절까지 연락을 하고 있었나? Ai 그록에게 공장주소를 쓰고 AMK한명수 공장장을 찾아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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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씨는 1977년경 청주시 송정동(현재 청주산업단지 일대) 공업단지 내 AMK 공장의 공장장(또는 주요 경영진)으로 근무했던 인물로 보입니다.
한명수 씨(본명 한무남으로도 불림)는 한동훈 (전 법무부장관, 국민의힘 정치인)의 친아버지입니다. 이는 위키백과, 나무위키, 여러 뉴스 기사(오마이뉴스, 경향신문 부고 등)에서 일관되게 확인되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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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2004년 고인이 되셨으니, 국민의힘 대표를 지낸 한동훈에게 SNS 등을 통해 고마움을 전하라는 친절한 안내까지 해준다. 그동안 전혀 알 수 없던 소식을 Ai가 찾아준 것이다.

세상에... 나의 키다리아저씨가 한동훈의 아버지였다니.. 는 나의 키다리 아저씨를 다시 만난 듯이 반갑 흥분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의 모습이 기억났다. 키가 훤칠하였고 잘생긴 영국신사 같았다. 그분이 진짜 '키다리아저씨' 속의 주인공처럼 생각되었다. 닮았다. 분명 한동훈과 부자지간이다.
인스타 주소를 확인하고 편지를 썼다. 맞는지 모르지만 맞다면 고마움을 전한다고, 응원하겠다는 말도 함께 썼다.
답장은 받지 못했다.

by 파도타기 <젠탱글 색칠>

대학 3학년때는 대학가에 불던 민주화 활동을 지원했고, 후배들이 스크럼을 짜고 교정을 돌며, 5공 공범 학장과 교수들은 물러가라고 노래하며 시위할 때도 박수를 치며 응원했다.

당시 전두환과 고향이 같은 학장과 교수들, 행정실장 교관 등 5명을 진주오적이라고 하며, 5공 정권에 부역하는 인물이라 하였다. 실제 그들은 교대생들을 여군훈련소에 보내기도 했다.


S교대 83, 84학번은 모두 여군훈련소에서 1주일인지 10일간인지 훈련을 받았다.는 출산 후 1년 만에 복학하였고 그해 훈련소에 입소해야 했다.

11m 공중 낙하 훈련도 했고, 총도 쏘았다. 좌로 굴러, 우로 굴러에 수술 후 아픈 배를 움켜쥐고 굴렀고, 행군도 했다. 피티체조도 하고 구호에 맞춰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것도 훈련이었다. 난 단 한 회도 못했다.

무서운 교관은 신기한 듯, 정말 못하느냐고 일반 사람 목소리로 물었다. 배를 가르는 수술을 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으니 내 복근은 힘이 없었다.


3학년 교생실습 때 이러한 소식을 처음 들었다. 교생들은 회의실에 모여 학교별로 토의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나는 우리가 한 번 하면 후배들도 다 하게 될 테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뿐이었다.

교육현장을 군대화하려 한다고 학생들은 반발했고 나 역시 회의 때 발언으로 고초를 겪었다.


교대 교관이 나를 좁은 회의실로 부르고 문을 잠갔다.

내가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것이고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두 시간의 대치로 난 잘못이 없는데 어찌 반성문을 쓰냐면서 끝내 쓰지 않았다.


문을 잠그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 무서웠다.

정신을 차리자, 날 때려도 성추행을 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는 그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계속 생글거리면서 응대했다.

나는 발표를 한 것이지, 선동한 것이 아니다. 당시 노동현장 위장취업으로 퇴학당한 문학동아리 선배를 말하면서 그런 일을 하지 않느냐고 했고, 아니다. 문학회는 선동 같은 무시무시한 말은 쓰지 않는다. 발표를 한 것이다. 농담처럼 웃으면서 두 시간을 버텼고, 회의실을 나온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대학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기운이 빠지고 눈물이 났다. 그리고 1년 후 결국 여군훈련을 받고야 말았다.


by 파도타기 젠탱글 색칠

이러한 일들을 후회하거나 자랑스럽다는 것은 아니다.

그땐 그게 옳았다.

그런데 돌아보니 나를 실제로 도운 사람들은 5공 인물 관련자들과 보수정당의 대표를 지낸 사람의 아버지였다니... 참으로 아이러니다.


5공 시절, 대학입시 방법이 바뀌지 않았다면, 인문계 영어와 수학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 같은 실업계 학생들, 과외를 받지 않아도 열심히 공부하면 충분히 경쟁할 수 있는 입시제도가 도움이 되었다. 전 과목이 다 중요한 입시로 개천에서 용을 만드는 제도였다. 그러나 결국 모든 과목을 다 학원과 개인과외를 받아야 하는 입시로 전락했다. 그래서 학생들을 지나치게 혹사하는 제도라 하여 입시 제도가 바뀌었다.

바뀔 때마다 누구는 기회를 얻고, 누구는 기회를 잃게 된다.

대입 준비 중 수학을 내게 가르쳐 준 사람은 5공의 주역 중 한 사람의 아들이다. 그는 내가 교장으로 있을 때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가 나의 '수학 사부'라면서 식사를 대접하란다. 기꺼이 그러겠다고 했지만 끝내오지 않았다. 5공이 무너지고 그들도 함께 무너진 듯 하다. 내게 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구나 했다.


과외금지 시절이었지만 그는 국영수 각 과목당 당시 50만 원을 주고 과외를 받으면서 본고사 중심으로 대입을 준비했는데 이듬해 1981학년도 입시가 바뀌면서 그 친구는 낭패를 봤다.


그가 누구의 아들이건, 내겐 소중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3 귀한 시기에,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를 위해 내준 시간들이 참으로 고맙다. 내가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닌지 미안한 생각도 했었다. 나를 가르치는 시간에 자신의 공부를 했어야 했을 텐데...

나는 당시 그의 이종사촌 집에서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고3이었던 두 남학생과 여름방학 때 그리고 휴일에 셋이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그때 내게 수학을 가르쳤다.


현실 삶에는 적군과 아군이 종종 바뀐다.

영원한 아군이라 믿고 함께했던, 친구라 여긴 사람들은, 어려울 때는 나를 비웃고 침을 뱉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속았다면서 배반감으로 정당화시키고, 친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언론과 법, 모든 무기를 동원하고 마녀사냥에 앞장선다.

정작 나를 돕는 사람은 적이라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 우리가 무시하고 비난했던 사람이 내 인생의 큰 도움을 주고, 치유하고, 위로하고 함께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예수는 묻는다 누가 친구인가?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모르는 사람조차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이념성향이 같아도 누가 더 선명한지 선명도를 따지고 평가하는 세상,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수레바퀴에 깔려야 했는가. 지금도 그렇다.


나는 더 이상 이념성향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다. 가족이 나와 반대 이념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나의 소중한 가족일 뿐이다.

누가 우리의 적인가?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나의 키다리아저씨는 내가 가장 힘든 시기에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정서적으로 후원한 참 은인이었다. 그가 누구의 아버지일지라도.

나는 그 아들에게 은혜 갚는 마음으로 응원할 것이다


*사마리아인은 이스라엘 북왕국 후손이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이 적국과 혼혈이 되었다는 이유로, 그들과 적대관계로 지내며 상종하지 않고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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