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것은 아름답다.
브런치 작가글을 읽다가
'성장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유년의 서글픈 증언록'이라는 표현이 숨을 막히게 했다.
성장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내용을 몰라도 그 언어 만으로도 너무 슬프지 않은가.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성장'이라는 단어를 붙잡고 살았다.
나의 '개천에서 난 용' 제목도 결국 성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해피앤딩이에요. 아무리 거칠고 고생한 이야기라도 염려 마세요.'라고.
나는 지나치게 절망적이거나 무서운 이야기, 폭력적인 장면이 많은 영화나 드라마는 상을 받은 것이든, 유명 감독의 것이든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이건 트라우마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사마리아 외에는 아무것도 안 봤다.
그냥 다 무섭고 잔인할 것이란 생각에 피한다. 그래서 스릴러도 피한다. 조마조마하고 심장이 뛴다.
성장드라마가 좋다.
[아무도 모른다(誰も知らない), 2004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는 아주 재미있게 보았다.
엄마가 떠난 뒤 방치된 네 남매의 생존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이다.
생존, 그건 성장의 또 다른 표현이다.
영화는 아이들이 서로 의지하며 버티는 모습과, 아무도 이 비극을 눈치채지 못하는 사회를 담담하게 보여주며 끝난다.
이 영화는 자극적인 장면을 거의 넣지 않고, 아주 담담하고 조용하게 비극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슴이 아프고 오래 남았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아이들은 꽃을 심고, 서로를 위로하고, 작은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절망적이지만, 인간의 존엄과 생명력 자체를 보여준다.
우리 집 베란다는 거의 식물원이다. 방과 거실에도 화분이 아주 많다. 이것은 모두 식집사 남편의 자식들이다.
은퇴한 남편은 50여 년간 모은 책을 반이상 버렸다. 책장도 분리수거되었는데 그중 차마 버리지 못한 책장, 아들에게 사준 것들 2개는 베란다로 가서 책 대신 식물을 키우는 집이 되었다. 그래도 책장은 6개가 남아있고 책은 빼곡하다.
난 그 화분들을 그림으로 그린다.
칼라데아 무사이카를 밤에 스케치하고 아침에 채색을 하려는데 달라졌다. 분명 어제는 잎들이 축 늘어졌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 가는 줄기에 의지해 큰 이파리를 똑바로 힘차게 들고 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채색했다.
아, 식물도 잠을 자고 기상을 하는구나.
아디안텀 고사리는 저면관수로 키우는데, 잠깐 물을 주지 않아 자갈이 바짝 말랐다. 그 잠깐 사이에 잎 끝자리가 말랐다.
그러나 죽지 않는다. 다시 물을 빨아들이고 싱싱하게 살아난다.
식물만 그러한가? 금붕어도 키우는데 오는 손님마다 너무 컸다고 한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식물도 동물도 쑥쑥 자란다.
오랜만에 만난 조카들은 어떠한가, 분명 중학생이었는데 좋은 대학을 갔다고 자랑스레 인사를 왔다.
성장, 난 그 성장하는 생명에 늘 경외심을 느낀다.
비틀리면서 성장하는 나무는 그 자체로 조형미 가득한 예술작품이다. 내가 이파리 없는 나목을 그리는 이유이다.
믿어주자. 죽을 것 같은 시련이나 버려짐의 고통 속에서도 성장하고자 하는 생명 본능은 죽지 않는다. 그리고 끝내 살아낼 것이다. 성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