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시집살이 그리고 내 유년

엄마의 기억은 오류?

by 파도타기


이번 설에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가 우리 집으로 외박을 나오셨다.

엄마는 평생 비린 것들을 잘 드시지 않았다. 돼지고기나 소고기, 고등어는 물론이고 멸치도 싫어하셨다.
비건 아닌 비건이다. 우유도 못 드시고 그러니 심한 골다공증이다. 잇몸뼈까지 괴사를 일으켜 틀니도 못한다.
문제는 이가 전혀 없으니 모든 음식은 다져서 해 드린다. 집에서 모시는데 가장 큰 장애이다. 처음 23년 4월에 낙상하여 대학 병원을 거쳐 요양병원에서 한 달 계시다가 우리 집에서 한 달 모셨다. 그때도 엄마의 먹거리 장만이 제일 힘든 일이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을 모두 다져서 드렸는데, 안 먹어 하면서 밀쳐냈고,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드려야 할지 몰랐다.
고기는 영양을 위해 억지라도 드시라고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고 분쇄 고기로 끓인 미역국도 안 드시고 고기조각을 뱉어낸다. 입맛이 없다면서 물김치 국물만 드셨다.

혼자 주덕에 살 땐 방문 요양사도 힘들었다. 갈치나 굴비는 잘 드셔서 한 토막씩 냉동 포장된 것을 보내드렸다. 처음엔 맛있다고 하고선 끝내 냉동실에 남아있다. 그러다 보니 영양부족으로 더 쇠약해져서 작년 7월을 못 넘길 것 같다면서 다시 요양병원을 거쳐 요양원에 계신 것이다.

무얼 해드릴까요? 지난번처럼 전복죽 끓일까?

아니.

그럼 또 육회?



결국 육회를 준비했다.
설날은 가게가 문을 닫아서 전날 늦은 저녁에 정육점에 갔다. 사장이 먹으려고 집에 가져가는 것을 반 덜어왔다. 330g, 그것을 두 번에 나누어 다 드셨다.
요즘 우리는 육회를 사드리려고 외출을 신청한다.
생고기는 굳지 않아 잘 넘어간단다. 자꾸 먹고 싶단다. '중이 고기맛을 보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더니 내가 그렇다'면서 자식들이 돈 쓰는 것을 미안해한다. 육회를 먹으면 어지럼증이 낫고 빈뇨감도 없어진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사드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육회를 드시러 우리 집에서 외박한 엄마에게 큰고모이야기를 했다. 큰고모가 펄쩍 뛰며 그런 일이 없다는 그 이야기다.
정말 큰고모가 엄마를 때렸어요?

엄마는 곧바로 흥분지수를 높이며 이야기한다.

내가 물동이에 물을 이고 부엌으로 들어서는데 둘째 고모에게 밥을 안 차려줬다고 할머니가 물동이 인 나를 부엌 나무광에 쳐 박았어. 옛날에는 부엌에 땔감으로 나뭇가지를 쌓아놓았지. 불을 때니까. 거기에 휙 쳐박히는데, 큰고모가 싸리빗자루를 가져와서 나를 같이 때리는 거야. 너네 둘째 고모가 학교를 다녔거든 한 12살, 5학년인가 그랬어. 그거 밥 안 차려줬다고 그런 거야. 큰고모는 17살이고.

할머니가 때리면 말려야지 그래, 같이 때려야겠어?

지금도 분이 안 풀린 듯 씩씩거리며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한다.
나는 시집와서 새댁일 때 이야기로 이해했다. 그런데 고모들 나이를 계산하니, 내가 5살, 엄마는 28살 때 이야기다.

원인과 상황, 고모들의 당시 나이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다니.. 60년도 더 된 이야기를 이렇게 꾸며낼 수 있을까?

엄마는 그러한 일로 시댁이라면 다 좋지 않고 마음속에 갈고리가 있어서 시댁 식구들을 늘 공격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좋은 일도 서운한 것 중심으로 말한다.
큰고모가 충무에 사시는데, 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늘 말린 멸치와 김을 박스로 보내왔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끊었다고 서운해했다.
사실은 큰고모는 그걸 보낼 형편이 아니다. 부잣집에 시집가서 잘 사셨지만 지금은 거의 독거노인처럼 당뇨로 고생하면서 혼자 산다. 내가 명절마다 용돈을 보내드려야 한다.
엄마는 고모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판단고 흉을 본다.
여자가 한이 맺히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는데... 한이 깊다.

엄마의 기억은 사실일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당시
내가 5~6살, 동생은 1~2살, 그때의 무서웠던 기억이 남아있다.


우리는 강원도 대하의 어느 신작로 바로 옆에 남루한 초가집 단칸방에 살았다.
엄마는 장사를 가셨는지 나는 동생과 하루 종일 집을 보았다.
동생을 업고 나갔다가 신작로 저 끝에서 큰 트럭이 달려온다. 나는 동생을 업고 그 신작로를 횡단해서 달렸다. 그러면서 죽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또 어느 날은 동네 거지할머니가 우리 집에 동냥을 하러 왔다. 넝마 옷을 입은 마귀할멈 같았다. 너무 무서워서 집으로 숨었는데, 싸리로 만든 울타리 사이로 우릴 찾는다. 동생과 함께 부엌벽에 바짝 몸을 대고, 숨을 죽이고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 할머니가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그 무렵 우린 강원도 묵호에도 살았다. 대하가 먼저인지 묵호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아마 묵호가 먼저이지 않을까?
엄마는 아침에 나가서 늦은 저녁에 물미역을 잔뜩 머리에 이고 오셨다.
나는 엄마가 바닷가에서 미역을 주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어서 나도 엄마처럼 미역을 주을 수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거의 한 조각도 쉽지 않았다.
엄마는 그게 아니고, 당시에도 잡화를 머리에 이고 뱃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과 담배, 술 등을 파셨단다. 농촌에서는 곡식을 받았는데, 뱃사람들에게는 미역을 돈대신 받은 것이었다. 엄마는 미역을 넓은 마당에 늘어놓아 말렸다. 요즘 2m나 되는 자연산 건미역을 엄마가 만들었고 다시 그것을 가게에 파는 것이었다.

사진: by. 파도타기<송지호 해변 >


나도 가끔 바닷가에 나갔는데 지금의 해변에 고등어를 산더미로 쌓아놓고 삽으로 퍼서 팔았다. 어떤 남자아이가 그것을 슬쩍 훔치다가 들켰고, 어른이 잡으러 뛰어가던 장면이 남아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가에는 원시인 집 같은 움집이 아주 길게 늘어져있다. 문이 열린 곳으로 안을 슬쩍 보았다. 바닥은 흙이고 길보다 한 뼘 정도 아래로 내려갔다. 거기서 밥도 해 먹고 잠도 자는 것 같았다. 지붕은 거적때기를 덮었다. 판자촌의 옛 버전이다.

1965년 경 나라에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강원도 바닷가는 여전히 원시인촌이었다.


또 어느 날은 외할머니가 오셔서 둘이 엄마를 마중 나갔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기다렸는데, 당시 태풍이 불었는지 검게 물결치는 바다에 엄청 높은 파도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 검은 바다는 공포였다. 그 파도가 언덕 위 우리까지 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동생은 기억에 없다. 어쩜 엄마가 젖먹이 동생을 또 업고 나갔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또 다른 기억은 혼자 집을 보고 있는데, 심심해서 나무로 만든 부엌문을 그네처럼 타고 놀았다. 그러자 그 문이 부서졌다. 그날 엄청 맞았다. 엄마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당한 강한 자극들이나 피해감정만 장기 기억에 남았다.

나는 요즘도 '엄마가 섬그늘에~'노래 가사만 들려도 눈물이 난다. 어린 내가 울고 있나 보다.

이야기를 정리하다 보면 도대체 엄마는 얼마나 떠돈 것인가? 묵호든 대하든 당시 아버지는 안 계셨다. 늘 엄마와 동생뿐이었다.
머니와 큰고모의 사건 이후에 집을 나가셨을까?

내가 젖먹이였던 때부터, 엄마는 종종 집을 나가셨나 보다. 괴산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시아버지인 할아버지가 데리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들어갔고 그 사이에 동생을 낳았나?

23살에 시집와서 그런저런 사유로 7년여 세월을 떠돌았나 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할 때는 괴산에 정착했다. 그것도 겨우 2년이지만,
충청도 산골에서 태어나 혼자서 강원도 바닷가까지 많이도 돌아다니셨고, 그 사이 자식을 다섯이나 두셨다. 그게 더 신기할 뿐이다.

엄마의 기억이 오류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기억도 오류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사람은 11% 인지 14%에 지나지 않는다고 책에서 읽었다. 정서적 충격을 받은 기억은 축소되거나 과하게 확대하기도 한단다. 내가 알게 된 것은 정말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것이다.

고생하셨어요, 엄마.
육회 많이 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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