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슬픔의 원인은 절대빈곤이 아니다
내가 9살 때까지 어떻게 길러지고, 살아왔는지 글을 쓰면서 정리가 되었다.
지금 기준으로 나의 유아기는 아동학대를 계속해서 당한 삶이었다.
젖먹이 때도 먹지 못하고 땡볕에 하루 종일 엄마에게 업혀 다녔고, 2~3살에는 식당 구석에서 설거지하는 엄마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 5~6살에는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며 하루 종일 혼자 집을 보거나 동생을 돌보며 지냈다. 7살 때 몹시 아파서 괴산에 보내졌고, 거기서 몇 개월인지 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부모님이 괴산으로 오셨고 분가를 해서 할머니 집에서 3km 정도 떨어진 마을에,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서 3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는 학교를 혼자 다녔다. 그 동네 아이들은 나와 반대방향으로 3km정도 떨어진 학교를 다녔다. 그 마을은 학구가 달랐다. 나는 할머니댁에서 입학한 학교를 계속 다녔다.
8살 나는 지나는 사람 아무도 없는 산아래 신작로를 걸었고, 큰 개천을 건넜다. 또 작은 산을 넘고 들판을 지나, 다른 신작로를 한참 걸어가면 내가 입학한 초등학교가 나온다. 등하교에 각각 1시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버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5원을 내고 타면 5분 만에 학교가 보이는 신작로에 내려주고, 거기서 또 개천을 건너서 들판을 지나 1km 떨어진 학교를 간다. 그러나 그건 몇 번 안 된다.
어린 시절에 대한 불평이나 슬픔이 없다.
당시는 가끔 꿈에 등굣길에 신작로에서 산도깨비가 따라오거나 신작로 옆을 흐르는 개천(당시는 물이 깊고 폭이 넓어서 강으로 알았다)에서 물귀신이 나와 나를 덮치는 꿈을 꾸긴 했지만.
내 주변엔 누구나 그렇게 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찍은 나의 최초의 사진을 보면, 일제강점기 교복 같은 것을 입고 있다. 검은색 광목천에 솜을 넣은 바지를 입었는데 무릎이 헤어져서 흰색 솜이 사진에 보인다.
학교에선 공부를 잘했고 부반장을 맡아 당당했다.
함석으로 만든 필통, 그건 계란을 점방(오늘날 편의점 같은 가게)에 가져다주고 산 것이다. 거기에 몽당연필 두어 개. 지우개 작은 조각이 전부였을 것이다.
500여 명의 전교생이 모두 책가방이 없었다. 내 친구 경연수 하나만 일본 아이들이 메고 다니는 네모난 가방을 서울 사는 누가 사줬다면서 메고 다녔다.
우린 책보에 책과 공책 필통을 돌돌 말아 허리에 질끈 묶고, 달랑달랑 필통 속에서 연필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다녔다.
남자아이들은 한쪽 어깨에서 등에 사선으로 두르고 가슴 언저리에서 책보를 질끈 묶고 다녔다.
아무도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검정고무신이 닳을까 봐 냇가에서 발을 씻고, 양손에 고무신을 들고, 맨발로 집까지 돌만 딛고 깡충거리며 오던 일, 냇가에서 남녀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멱감고 물싸움하던 일, 내게 풍뎅이라고 놀리던 남자애를 잡으러 뛰어다닌 일...
그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마흔 살이 되어 우울증이 왔을 때에도, 고향의 따스한 언덕(산소가 있는)과 학교운동장에서 깔깔거리며 노래 부르고 고무줄 놀이 하던 어린 내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 치유를 하였다.
그러한 것들이 가난의 상징이었던 것은 제천, 작은 읍내로 전학 간 이후였다.
엄마는 도시 아이들처럼 내게 옷과 가방을 사주었고, 화판도 사 주었다. 설레서 잠도 못 잤다.
그러나 초등학교 3학년, 전학 간 첫날 아이들은 금세 눈치챘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몽당연필 두 자루가 든 함석 필통을 들고 있는 나를...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필통을 가져갔고 연필을 가득 채워서 돌려줬다. 당시 나는 그저 행복했다.
담임이 내 성적을 이야기하면서 좋게 소개한 까닭이라고 믿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내 옷이 가장 싼 나일론으로 짠 덥고 답답한 옷이라는 것을 알았고, 친구들은 입고 있지 않았다. 남자용 검정고무신은 전교에서 오직 내 것뿐이다. 그때부터 내 모든 것이 부끄러웠다.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사는 거지였다. 좋은 일은 더 이상 없는 듯했다. 시험점수는 내가 더 높은데 우등상은 우리 반 반장이 받았다. 시골에선 당연히 내 것이었던 것들이 나를 스쳐갔다.
슬픔은 한순간에 내 우주를 덮었다. 8년 동안..
내 슬픔의 원인은 절대빈곤이 아니다
시골에 계속 살았던 동갑내기 동창은 중학교도 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슬퍼하지 않고 늘 당당하게 새마을운동의 역군으로, 4H활동을 하며 청년단장도 하고, 마을부녀회를 이끌며 잘 살았다.
지금도 괴산남자와 결혼해 과수원도 함께 운영하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산다.
둘째 고모는 나를 보면서 '나도 너처럼 어떻게 하든 공부를 했더라면..'하고 아쉬움을 표한다. 그렇다, 고모도 공부를 잘했고, 지금보다 더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를 이루었지도 모른다.
사회적 지위나 물질적 풍요보다 조카와의 비교가 가끔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서글픔일 것이다.
내가 시골에서 계속 살았다면 내 어릴 적 친구처럼 살았을 것이다. 도시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비하 비교 강박은 사회적 위치나 물질적 풍요를 뛰어넘는다. 성공과 상관없이 매 순간 자신을 괴롭히는 트리거가 된다.
예전엔 신발과 옷이었지만, 이제는 집이 되고, 가족이 되고, 언어나 성격, 재능까지 비교 대상이 된다.
글을 쓰면서도 다른 작가와 비교하고, 그림을 그리면서도 40년 그린 화가와 비교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잘 살았다. 결핍으로 휘어진 나무로, 상처가 훤히 보이는 하얀 자작나무로...
그래서 더 아름다운 나무로 성장한 나를 토닥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