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질이구먼
브런치 작가의 글을 읽었다. 그리고 그 작가에게 쓴 독자의 댓글을 읽었다.
"글 쓰는 사람은 사소함과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여겨 글로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뜻한 마음씨"가 독자의 마음을 데우고 댓글과 라이킷을 부른다.
개천에 살던 시절에는 허우적거리느라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조차 없었다.
고층에 오른 뒤에는 목에 찬 깁스 때문에 점점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힘들어졌다.
나의 성취들은 개천을 벗어나게 해 준 지렛대였지만,
그 과정에서 몸과 마음에 깁스가 단단히 둘러져 굳어 가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다.
내 브런치 하루 조회수가 200이 되더니 250으로 갑자기 늘었다. 좋아서 아들에게 자랑했다.
인기가 차곡차곡 쌓이네요 축하드려요!!
아들의 칭찬에 잠시 행복했다.
그런데 라이킷 수는 별로 늘지 않는다. 댓글도 없다.
브런치 작가들 글을 읽었다. 대단하지 않은 일상들이 봄볕처럼 따스하게 펼쳐진다. 그 햇살마다 작가의 예쁜 마음이 반짝인다.
독자들이 그 마음을 알아채고, 놓치지 않고 댓글로 남긴다.
내가 가장 부족한 부분이다.
나는 교육청 등 기관에 성과보고서를 많이 제출했었다. 지금은 브런치 독자들에게 에세이 아닌 내 삶의 성과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상도 안 주는데 자랑질이다.
인간 승리를 축하해.
옛 스승이 축하하는 문자를 보냈다.
역시...
입지전적 인물 맞으셨네요.
감동적인 인생...
존경합니다.
부끄러운 나의 개천이야기입니다. 개천의 상처를 걷어내고 꼬인 생각들을 털어내려고요^^
자랑스러운 이야긴데
털어낼 필요 있나요.
예전에 모시던, 동갑내기 교장선생님도 응원했다. 내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던 분이다. 갑자기 높임말을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내가?
입지전적(立志傳的)은 힘든 환경을 이기고 뜻을 세워 노력해 목적을 달성한 사람의 전기(입지전)라고 한다,
나는 뜻을 세운 적이 없다. 늘 생존에 허덕였고, 좀 더 나은 생존을 위해, 바로 위 계단 하나 오르고 싶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생소하고 부끄럽다.
'어려운 환경을 이기고' 정도는 맞다고 하자.
나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가?
절대 이런 글은 쓰지 말라고 조언한 브런치 작가도 있다. 성공담 같은 자랑질을 피하라고 했다. 그럼 뭐 쓰지?
자기 비하를 통해 자랑질이 아니라고 교묘하게 글을 썼지만, 똑똑한 독자들은 금세 눈치챈다.
자랑질이구먼...
나의 사회적 경제적 성취는 내 속에 있던 인간애를 삼키고 있었나 보다.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아들이 나의 소문을 들었나 보다. 자세히 이야기를 하지 않아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좋은 소문이 아니다.
일부 교사들은 교감이나 교장을 밥반찬, 안줏거리 삼아 험담하며 윗사람에게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낸다. 다른 직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이기만 하면 윗사람 이야기로 채운다. 관리자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마음을 달랜다. 물론 엄청난 비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모임이 끝나면 잊힐 수다에 지나지 않는다. 수다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최고의 처방이다.
아들도 수다방 어느 한켠에서 그 어떤 대사 한 줄을 들었을까? 금방 잊히는 수다라도 자기와 연관된 내용은 사소한 것들도 목에 가시처럼 걸린다.
아들은 승진을 포기했다. 그들의 험담 대상에 엄마도 포함된다는 고통 때문이었을까?
대학생 시절, 아들은 교회 청년들이 아버지인 목사님을 험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크게 충격받았다.
자신이 바로 그 목사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험담을 쏟아내는 모습에 분노가 폭발했다.
그날 이후 아들은 교회를 완전히 떠났다.
아들이 들은 어떤 부정적인 소문이 신경 쓰였다.
아들이 옮긴 것은
'엄마도 선생님들이...'
까지 하다가 말을 멈췄다. 느낌이 안 좋았다.
아들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인가?
묻지 않았다.
속상했다. 억울했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았다. 한 순간도 진심이 아닌 적이 없었다.
겉으론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억울하다고 외쳤다.
교사시절 3월이 되면 학부모들이 긴장해서 담임을 관찰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소문이나 의심을 퍼뜨린다,
늘 당하는 일이라 신경이 쓰이지만 대응하지 않는다.
1년 후, 그때도 같은 말을 할지 두고 보자.
나는 3월. 첫날 아이들에게 선포했었다.
너희는 어제 용꿈을 꾼 거야? 나는 최고의 선생님이거든, 공부를 가장 재미있게 잘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야.
고학년들은 야유하고 저학년은 감동의 눈빛으로 기대에 차 있다.
나는 늘 나의 꿈과 성취목표를 선포하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월 종업식 날 묻는다.
나와 함께한 1년 동안 행복했나요?
네~~~~~~~~
아이들은 우렁차게 끝이 나지 않을 대답으로 내게 성적표를 주었다.
됐다. 그거면 됐다. 3월에 의심을 하던 학부모들은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아들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그렇게 살지 않았어. 다른 사람은 몰라주어도 아들은 엄마를 믿어주라.
그래서 자꾸 변명하는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들, 사랑해.
MBTI 검사를 했다
애써 스스로를 탐구하려 했던 나의 모습을 스캔하고 거울처럼 보여준다. 그동안 난 무얼 한 거야? 사주풀이도 아니고 무속인도 아닌데 모두 맞는 이야기다. 내가 그런 사람이지. 그래서 그런 행동을 했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친절하게 생활안내까지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늘 열심히 살고 또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타입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산다는 것, 올바로 산다는 것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항상 여유를 갖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떠한 것이 정작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인지 자주 원점에서 생각해 보세요.
네, AI선생님, 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