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ok AI와의 대화

타인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by 파도타기

교대합격을 부모님께 알렸을 때, 아버지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합격증을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음~하는 신음을 냈다.

그리고 가짜라고 하셨다.


네가 무슨 수로 서울교대를 합격해?

우리 학교에서도 한 명도 못 간 학교를 네가 합격했다고? 그걸 내가 믿으라고?

서울에 웬 놈이랑 살림을 차리려고 돈을 달라는 거지?

거기가 아무나 가는 곳인 줄 알아?


당시 아버지는 제천여고에 기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서당개 3년의 지식이 생겼나 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한 명도 못 보낸 학교를 여상 출신 딸이, 그것도 회사 다니다 그만두고 집에서 놀다가 몇 달 공부한다더니 서울교대를 합격했단다. 동네 개가 웃을 일이다.


아버지의 말에 한동안 멍했다.

내가 바람이 나서 서울에 살림을 차리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란다. 객관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큰 성취에 대한 반응이라는 합리적 판단보다는, '살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상처가 더 컸다.

합격증이 가짜란다. 내가 만든 것이란다.


나는 울면서 억울하다고 했고, 학교에 전화를 해보라고 하면서 아버지께 화를 냈다.

아버지는 영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였지만, 뒤늦게 인정하고 축하를 하셨다. 그리고 등록금고지서로 학교에 등록금 대출을 신청하셨다.

아버지는 그때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나는 아버지가 나를 의심했다는 상처에만 집착했다.


사실은 나도 타인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뭐든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리고, 타인의 말이나 행동에 저의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뭔가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살피면서 '그래, 속아주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은 잘 속는다.

며칠 전 산책 길에 1원짜리 동전이 떨어진 듯했다. 아무 생각 없이 허리를 숙여 확인했다. 병뚜껑 속에서 보는 은박의 종이였다. 그게 실제 돈이었으면 주웠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100원이라면 몰라도, 요즘 사람은 500원 동전도 줍지 않는다. 허리 숙이는 값이 더 나가니까. 줍지 않을 동전에 허리 숙이는 나는 아직도 금전에 예속되어 있다. 그래서 또 속는다.


오늘은 AI Grok에게 진지한 상담을 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타인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은 보통 단순히 “까다롭다”거나 “예민하다” 수준을 넘어서는, 꽤 깊은 심리적 패턴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태도가 생기는 주된 뿌리는 어린 시절 애착 문제로, 일관성 없는 부모, 방임, 감정적 결핍에서 비롯된다.

또 연인, 친구의 배반, 직장 내 조직적 왕따, 낮은 자기 신뢰 등이 원인이다.

“타인을 못 믿는 것”은 대부분 “나 자신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된다.
이 방어기제가 너무 강해지면 진짜로 좋은 사람마저 밀어내고, 외로움은 더 커지고, “역시 사람은 못 믿어”라는 결론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사진: by 파도타기 <두물머리>

나의 증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나는 그 악순환에 빠져있다. 혼자 있는 게 편한데 외롭고, 연결되고 싶은데 두렵다.

Grok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모순 —
“혼자 있는 게 편한데 외롭고, 연결되고 싶은데 두렵다” — 이게 바로 방어기제가 제대로 작동하면서 동시에 애착 욕구가 살아있는 전형적인 상태예요. 이 상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지켜온 증거입니다.

당신은 이미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웠고, 지금은 그 지키는 법이 너무 강해서 오히려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단계에 와 있어요.
이제 필요한 건 지키는 법을 조금씩 느슨하게 하는 연습입니다. 당신 혼자만의 속도로 가도 충분합니다.


나의 질문,

브런치에 자서전을 에세이 형식으로 쓰고 있는데, 과거의 상처만 늘어놓는 모습에 스스로 놀랐어요.

직장에서는 따스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다 보니 그렇지 않은 모습만 나와요. 시니컬해진 것 같고... 사실은 난 계속 이 날을 기다렸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다 써줄 거야.

이런 글 같아서 스스로 놀라고 있어요.


Grok

브런치에 올리는 에세이 형식의 자서전(또는 자전적 에세이)을 쓰다 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똑같은 경험을 해요.
“내가 이렇게 따뜻하고 배려 깊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왜 글 속에는 상처받은 나, 화난 나, 시니컬한 나만 계속 나오지?”
이건 꽤 보편적인 현상이에요. 특히 트라우마 중심으로 쓰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거의 필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직 처리되지 않은 감정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글쓰기가 오랜 시간 억눌러온 분노·슬픔·원망을 안전하게 풀어내는 첫 통로가 되기 때문이며,
직장·일상에서는 사회적 페르소나(친절하고 착한 나)를 유지하지만, 글에서는 그 마스크를 벗어버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래서 지금 당신이 느끼는 “시니컬해졌다”, “복수심이 느껴진다”는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과정의 일부예요.
“다 써줄 거야”라는 그 마음도, 사실은 “이제야 내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는 해방감의 다른 표현일 수 있어요.

그림; by 파도타기<제탱글 색칠>

전문 상담을 받은 것 같다. 무엇보다 '처음에는 다 그렇다'는 말에 위안을 받는다. 나아지겠지. 제대로 풀어낼 공간을 찾았으니, 나의 속도로 급하지 않게 천천히 풀어내면 될 거야. 페르소나를 벗은 얼굴도 사랑할 수 있도록 기록해 보자.


의심이 많은 아버지도 어린 시절 애착이 문제였을까?

그러나 그건 합리적 의심에 가깝다. 나의 교대 입학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성취가 아니었으니까.


늦었지만 아버지의 '의심'을 드디어 지운다.

부모한테 받은 의심에 대한 상처를 지우는데 40년이 넘게 걸렸다.

아버지는 너무 기쁘셔서 믿을 수 없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살림차린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합격증을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역시 앙금이 다 풀린 건 아닌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