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소설1

그 남자는 제비

by 파도타기

자는 남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도록 안내했다. 급하게 제천에 가야하는데 리포트 제출하는 날짜를 지킬 수가 없었다. 교수는 날짜를 어기는 리포트는 감점을 주었다. 남자에게 리포트를 완성해서 제 날짜에 제출해 달라고 부탁할 예정이었다

여자는 서초동 빌라에 방 한 칸을 얻어 자취하고 있었다. 여자의 회색 실크원피스가 수녀복 같다면서 여자보다 몇 살 위인 새댁, 주인아주머니가 당신의 원피스를 입고 가라고 빌려주었다. 그 원피스는 꽃분홍색이었고 동그란 무늬가 겹쳐 그려진 하늘하늘한 봄옷이었다. 눈에 띄는 색이라 절대로 사지 않을 옷이고 생각하며 입었다. 예뻐 보인다.


너 바람났구!

대학교 강의실 입구에서 만난 교수는 여자의 눈에 띄는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으며 말했다.

여자는 나쁜 짓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얼굴이 빨개져서 그 자리에 굳은 채 뭐라고 변명을 하려다 얼른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동기들이 들었을까 불안했지만, 강의실을 둘러보며 짐짓 아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교수님도 그렇지. 갑자기 사람 무안을 주다니.. 그래도 옷이 날개라고 좀 이쁜가? 어떻게 알았지? 귀신이다.


업이 끝나고 여자는 남자에게 가기 위해 지하철 2호선 교대역으로 내려갔다. 지하철 안에서도 자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내가 바람난 것을 눈치챘나? 분홍빛 하늘하늘한 원피스가 마음을 흔들며 가볍게 날리고 있었다.


남자의 자취방이 있는 동네 가까이 가자 남자가 버스정류장까지 마중 나왔다. 너무 예쁘다. 여자의 분홍빛 원피스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고 여자는 부끄러운 듯 팔을 피했다.


어서 와, 잘 왔어.

처음 만난지 3개월 조금 지난 오늘, 드디어 여자가 내게로 왔다는 사실에 온몸이 떨렸다. 여자의 손을 잡고 자취방이 있는 대학교 정문 방향으로 걸어가는데 친구들과 만났다.


와, 연예인이다. 형, 너무 예뻐요.


남자는 군필로 동기들보다 4살 형이었다. 같은 과 친구들이 복사꽃 같은 화사한 여자를 보고 연예인이라 추켜 세우며 소문을 냈다.

남자는 친구들이 놀리는 말에 기분이 더 좋았다.

여자가 돌아간 뒤. 친구들이 남자에게 어떻게 그런 미인을 만나게 되었는지 물었고 신나게 자랑한 남자는 그 후 제비라는 별명을 얻었다.

남자의 집은 영주였고 여자는 제천이었다.
영주에서 중앙선 완행열차를 탄 남자가 제천에서 같은 열차를 탄 여자를 만난 것이다.

여자는 그가 제천에서 탔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청량리까지 긴 시간을 가야 하는데, 예쁜 아가씨 둘이 들어왔다. 그래서 화장실을 간 것처럼 했다가 바로 여자의 맞은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여자는 중학교를 막 졸업한 여동생을 데리고 구정을 지내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여동생은 눈이 동그랗고 귀엽고 예쁘다. 남자는 여동생이 김혜수를 닮았다고 말했다. 처음에 눈이 간 사람은 여동생이었는데, 알고 보니 너무 어리다. 그래서 바로 타깃을 바꾸었다.

여자는 열성 교인이었는데, 차를 타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도를 했다. 생글거리며 예수를 믿으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이야기하면서 전도를 하고,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차가 도착하면 헤어졌다.

이번엔 남자의 손에 기독교잡지가 들려져 있었다. 전도가 아니라 여자가 아는 신학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눴다.
폴틸리히의 New Being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대하여 아는 체를 했다.
고등학교 때 전도사님이 쓴 석사 논문을 읽었고, 그 이야기를 한 것이다.
남자는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고, 여자 자신보다 말을 잘하는 남자라고 생각했다. 디트리히 본회퍼 은 신학자 이야기를 하다가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헤르만헷세의 작품 토론도 했다.


저는 데미안 보다 싱클레어가 더 정이 가요. 싱클레어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꿈이나 환상, 그림을 통해 내면을 탐구하는 모습도 멋있고요. 또 유명한 말 있잖아요? 새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남자는 외우듯 읊는다. 여자가 싱클레어에게 더 정이 간다는 말에, 여자도 싱클레어 처럼 순수하고 신앙이 깊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싱클레어는 사회와 도덕의 틀에 갇혀 고통받다가, 내면의 목소리, 즉 데미안을 따라 자아실현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성장하고 방황하는 청춘을 대변한다고 할수 있겠죠.


새가 알에서 깨어나는 것, 그것은 세계를 파괴하는 것이라는 말이 너무 좋아요. 결국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사회의 틀이나 규범, 많은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잖아요? 그래야 비로소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이런 말이죠? 자기 세계를 파괴 하고 넓은 하늘을 나는 것이 너무 멋있지 않아요?


여자도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자기 주장을 펼쳤다.

처음으로 문학토론이 가능한 남자였다. 물론 여자보다 항상 더 많이 알았고 친절하게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런 걸 아느냐'며 추켜세웠다.


사실 여자가 벗어나고 싶은 것은 사회적 규범이나 틀이 아니다. 그건 가난이라는 굴레이고, 술취한 아버지의 폭력과 무지하고 교양없는 엄마. 부끄러운 가정환경이었을 것이다. 굴레들은 여자의 앞길을 얼마나 막아섰던가! 벗어날 수 없는 두꺼운 알껍질을 깨고 여자는 날개짓을 시작하려고 한다. 그것이 여자가 교대에 입학한 이유일 것이다.


남자가 벗어나고 싶은 굴레도 역시 가난한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이 아닌가! 사명감으로 사는 삶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기도의 응답으로 이렇게 예쁜 여자를 만나지 않았는가.


청량리에 도착하면 끝날 만남이다. 늘 그랬듯이.

남자는 날도 어둡고 동생이 배도 고플 것이라며 식사를 하고 가자고 제안했다.

여자는 엄마가 싸준 음식과 익모초를 끓인 큰 간장병이 든 박스를 들고 가야 했다. 짐이 무겁고 힘에 겨웠다. 남자는 청량리에 도착하자 이 박스를 들어주었다.

착한 신학생, 여자는 그를 믿었다. 남자는 봉사하는 마음으로 서초동 집 근처까지 무운 짐을 들어다 것이다. 얄팍한 계산이 생겼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따라 식당으로 갔다.

남자는 자기는 배가 고프지 않다면서 돈가스 1인분을 시켰다. 세 명이 들어갔는데 1인분이라니...

아,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여자가 교대를 다닌다고 했더니 교대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교대역은 알지만 교대가 대학교인 줄은 몰랐다. S교대를 모르다니... 그는 참 순수한 사람이라고 여자는 생했다.


성직자의 청빈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존경받을 가치였다. 그는 첫눈에도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홀쭉한 몸매, 패인 볼, 남루한 의상... 얼굴에 버짐 같은 것이 하얗게 보였다.

그림: by파도타기 <휴식>

남자는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강남역까지 오는 내내 여자를 쳐다보았다. 따스한 미소를 짓고 행복에 겨운 표정이다. 남자는 기도를 했었다. 자신이 다니고 있는 교회 목사님 부인인 사모님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여자를 본 순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갸름한 얼굴, 곱슬머리와 미소까지, 그래서 기도의 응답이라고 굳게 믿었고 그게 신기해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이렇게 따스한 눈으로 오래 봐준 적이 있었던가? 여자는 그의 시선을 느끼며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지었다.


여자들은 따스한 미소에 마음을 빼앗기고 짐을 들어주는 작은 친절에 인생을 거는 어리석은 동물이다.


집을 가르쳐 주기 불편해서 근처까지 오자 고맙다면서 보내려 했다. 그러나 반드시 집까지 들어다 준다고 했다. 여자는 그를 이용하려다 오히려 집을 알려준 것이고 그는 종종 집에 찾아왔다. 그 후부터 여자는 모르는 남자에게 전도하지 않는다.

그렇게 뻔한 연애가 시작되었고 친구들은 어떻게 기차에서 여자를 꼬실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한동안 그를 제비라고 놀다.



※ 이글은 자전적 소설로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진: by 파도타기<오리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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