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소설 2

노래에 반하다

by 파도타기

기차에서 만난 이후 남자와 여자는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영등포역 시계탑 앞에서 만났는데, 여자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자는 황토색 외투에 붉은색 체크무늬의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다. 외투는 길지 않아서 허리 아래까지 덮었다.


남자는 반가우면서도 여자의 모습이 예전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쌀쌀한 탓인지 어깨를 움츠리고 서있다.

월하미인이라고 했던가? 아침 10시, 햇살에 노출된 여자의 얼굴은 화장끼 없이 창백하기보다는 노랗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기차에서 만난 그 아름다운 여자가 아닌 듯하다. 어정거리며 걷는 모습도 매력을 반감시킨다.


남자는 환한 미소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여자도 수줍은 듯 미소 짓는다. 둘은 지하철을 타고 이대 앞으로 갔다.

아름 커피숍에서 여자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는 이미 결혼했는데, 여자와 중학교 동창이라고 했다. 키가 크고 밝은 표정의 친구는 매사에 당당한 모습이다. 여자의 친구까지 소개받고 보니, 훨씬 가까워진 것 같다. 커피숍 조명에서 보는 여자는 다시 미인이다. 웃는 얼굴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둘은 다시 장충공원으로 이동했다. 장충공원을 걷는데 여자가 횡설수설한다. 과거가 있다는 둥, 자기는 죄 많은 여자라는 둥... 남자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다 용서하리라 생각했다. 과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렇게 사랑스러운 여자의 과거는 매력이 넘친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여자는 첫사랑과 온전한 이별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다른 남지와의 만남이 탐탁지 않았다. 첫사랑이 이별도 하지 않은 채 결혼했고, 여자는 배반의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자는 대학에 입학해서 지도교수의 조교가 되었다. 어느 날 지도교수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여자는 단지 그 단어만 들었다. 그리고 숨이 막혔다.

시공을 넘어온 첫사랑의 목소리...


여보세요, 수진아,

아, 네, 네, 교수님...


교수님 목소리가 첫사랑과 닮았다니, 교수님은 목소리뿐만 아니라 겉모습도 닮았다. 훤한 이마, 깊은 눈, 높은 코, 분홍빛의 볼록한 입술, 하얀 피부,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교수님을 보면 자꾸 첫사랑이 생각나 눈물이 났다.


그뿐이 아니다. 며칠 전에는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멈췄다. 첫사랑의 향기가 스쳤다. 순간 뒤돌아보니 뒷모습이 비슷하다. 뒤돌아서 뛰어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냥 걸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다시 살피니 젊은 청년이다. 설마 동생일까? 같은 향수를 썼나 보다


여자는 이런 마음으로 다른 남자와 사귀는 것에 회의가 생겼다. 그리고 신학생이다.

내가 사모가 된다니 상상할 수도 없다.

여자는 이별을 준비하며 횡설수설했다.


사실 남자도 과거가 있었다.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같은 학교 후배를 소개받아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

그러나 인연이 아니었나 보다. 인연은 노력으로 엮는 게 아니다. 상처만 남기고 헤어진 후, 새로 만난 여자와는 정말 은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림: by 파도타기 <축하해>

어스름한 저녁, 여자를 데려다 주기 위해 교대 담장을 따라 걸으면서 남자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우리는
아주 작은 몸짓 하나라도 느낄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소리 없는 침묵으로도 말할 수 있는 우리는
마주치는 눈빛 하나로 모두 알 수 있는 우리는
우리는 연인

기나긴 하세월을 기다리어 우리는 만났다
천둥 치는 운명처럼 우리는 만났다
오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하나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우리는 연인

대학생들이 모두 귀가한 교대 주변의 서초동길은 고요하고 인적이 드물었다.

남자의 애절한 노래가 잔잔하게 퍼졌다.


여자는 단단히 쌓은 벽이 허물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송창식의 목소리가 아니어도, 진심이 가득한 구애의 노래에 여자는 가슴이 저렸다.



※ 이 글은 자전적 소설로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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