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여행 4

숨은 맛집 고딕지구의 슬픔

by 파도타기

요즘 사람들의 외식은 맛집 탐색부터 시작된다. 길을 가다가도 맛집은 금방 구분된다. 넓은 주차장이 여기가 바로 맛집이에요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또 다른 맛집 탐색가는 주차장 없는 골목, 지역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숨은 맛집을 찾아다닌다.

우리도 춘천 어느 시장 골목에 숨은 맛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주차 공간이 없어 골목길에 겨우 세워야 했다. 만둣국을 먹었는데, 과연 소문난 숨은 맛집이었다. 직장인들이 빈 의자 없이 가득했다.


관광지도 그런 것 같다. 바르셀로나 관광 맛집은 누가 뭐라 해도 가우디 작품들이다. 특히 사그리다 성당과 구엘공원, 카사밀라 등의 건축물은 그 도시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필수코스다.

패키지여행을 한 지인이 피카소미술관은 갔지만, 미로미술관은 몰랐다고 했다. 또 고딕지구는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가우디의 화려한 곡선과 독창적인 미학에 매료되어 도시를 누비던 중이었다. 우연히 마주친 고딕 지구는 가우디의 찬란함과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가우디의 곡선 아래서 탄성을 내뱉을 때, 나는 고딕 지구의 좁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엔 매끄럽게 닦인 대리석 대신, 세월의 풍파와 인간의 광기가 할퀴고 간 거친 석조의 맨살이 있었다.


문득 영국의 코벤트리 대성당이 떠올랐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영국 코벤트리 시와 대성당이 말 그대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당시 성당은 지붕이 무너져 내리고 외벽만 겨우 남은 폐허가 되었.

공습 다음 날, 성당의 석공이었던 자크 굴드(Jock Forbes)가 불에 탄 성당의 서까래 두 개가 십자가 모양으로 겹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이를 그대로 묶어 세웠고, 이것이 현재까지도 파괴된 성당 제단 뒤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고 했다.


폭격으로 무너진 지붕을 고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열어둔 채, 화해와 평화의 십자가를 세운 코벤트리,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 역시 나에게는 그런 존재였다.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 역사의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서 있는 그 오래된 벽들 앞에서 나는 관광객의 호기심 대신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힘든 깊은 '연민'을 느꼈다.


가우디의 곡선미 넘치는 작품들을 본 뒤에 마주한 고딕 지구(Barri Gòtic)는 정말 차갑고 단단한,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화려한 색채 뒤에 숨겨진 묵직한 중세의 공기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우디의 건축이 살아 움직이는 자연의 곡선이라면, 고딕 지구는 시간이 멈춘 듯한 엄격한 직선의 세계다.
가우디가 흙, 돌, 철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준다면, 고딕 지구의 건물들은 수백 년의 무게를 견디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수행자 같은 느낌을 준다.


산 펠립 네리 광장 벽에는 흔이 종종 보인다.

산 펠립 네리 광장. 탄흔모습

이곳은 스페인 내전(1938년) 당시 비행기 폭격이 있었던 곳이다. 벽에 남은 수많은 구멍은 장식이나 세월의 흔적이 아니라, 당시 폭격으로 희생된 아이들과 시민들의 아픔이 새겨진 자국이라고 한다.
지금은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광장이지만, 그 벽면의 상처만큼은 여전히 그날의 참혹함을 증언하고 있어 묘한 긴장감을 준다.


왕의 광장(Plaça del Rei) 근처에는 과거 종교재판소나 감옥으로 쓰였던 건물들이 있었다. 차갑고 높은 벽들이 빛을 차단해 낮에도 서늘한 기운이 도는데, 이 압도적인 분위기가 감옥을 떠올리게 했다.

저 작은 창이 감옥에 난 숨구멍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셀로나 고딕 지구, 인간의 자유를 억압했을 그 좁은 감옥 창을 마주하는 순간, 신혼 초 지하방의 눅눅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곳은 나에게 창살 없는 감옥과 다름없었다.


우리는 경기도 작은 소도시에서 1년을 살고 나의 복학을 위해 성남으로 이사했다. 문제는 방값이었다. 내가 흑석동 꼭대기에서 살던 전세 300만 원에 시어머니가 200만 원을 보태서 성남 다세대 지하방을 얻었다. 천정 가까이 가로가 긴 직사각형의 작은 창문이 있었고, 방에서 창밖을 보면 사람들의 발만 보였다.

10평의 지하는 방이 두 개였고, 작은 방은 두 시누이와 시어머니가 사용하고 우리 부부는 아들과 안방을 사용했다. 물을 쓰면 고인 물을 모터로 퍼 올려야 했다.

당시 나는 교대 복학으로 졸업반이었는데 미술교육과 특성상 실기과제가 많았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에 남아서 서예 작품을 20장씩 써야 했고, 졸업작품을 위해 한국화를 그렸다. 중노동이었다. 별로 먹지도 못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매일 어지럼증을 느꼈고 싸구려 빵을 사서 먹고 버스를 탔다.

집에 도착하면, 첫돌 지난 아들을 돌보던 큰 시누이는 대학입시 공부를 위해 나갔고, 아이는 울면서 달라붙었다. 시장에서 막 돌아오신 시어머니는


에그~ 우리 손주가 효자다. 엄마 일 못하게 하는 거 봐라.

하며 웃으셨다.


​나는 단지 한 남자와 결혼했을 뿐인데, 눈을 떠보니 얼굴조차 낯선 가족들의 '하녀'가 되어 있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해오신 시어머니는 매일 찬거리를 양손 가득 사 오셨다. 그동안 떨어져 살며 자식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했던 세월의 한을, 이제야 밥상 위로 쏟아내시는 듯했다. 하지만 그 넘치는 식재료는 고스란히 나의 노동이 되었다. 물론 김치나 중요 반찬은 시어머니가 직접 하셨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집안일에 손을 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내가 '며느리의 본분'을 잠시라도 잊을까 끊임없이 경계하며, 당신의 젊은 시절을 훈장처럼 꺼내 놓으셨다.
"나는 일할 때도 아이를 단 한 번도 땅에 내려놓지 않고 늘 등에 업고 일했다."
지독하고도 절절한 모성애의 과시였다. 당신이 짊어졌던 그 생의 무게를 나 또한 당연히 짊어져야 한다는 소리 없는 압박은 지하방의 습기보다 더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10년 동안 1인 가족으로 살았고 밥도 제대로 해 먹은 적이 없었다. 6 가족의 살림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어머니는 엄청난 제사 음식 재료를 사 오고는,

'할 것 업다. 뭐 할 것 있다고, 금방 하지. '하셨다.

억척스럽게 살아오신 48살 젊은 당신에겐 내가 하는 일이 소꿉놀이로 보이셨을까?


싱크대에는 설거지해야 할 그릇들이 늘 가득 쌓여 있었고, 욕실에는 여섯 식구가 쏟아낸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탁기도 없던 시절, 낡은 탈수기 하나에 의지해 그 많은 빨래를 일일이 손으로 빨아야 했다.
​거칠게 빨래를 비비며 눈물을 훔쳤고, '며느리'라는 말은 '하녀'를 고상하게 부르는 이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각은 아주 사소한 순간마다 칼날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시누이가 포도를 먹고 빈 접시를 바닥에 내팽개친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을 때, 심지어 친구들의 속옷까지 내게 빨라고 내밀 때, 나는 이 집안에서 인격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소모품 같았다.


​어디 노동뿐이었겠는가. 나를 향한 남편의 지독한 사랑조차 나에게는 또 다른 짐이었다. 하루 종일 학교과제와 가사 노동에 시달린 몸은 시신처럼 널브러졌고, 매일의 일상은 어지럽게 이지러졌다.


​보다 못한 한의사가 아들의 보약을 지으러 온 시어머니에게 "아드님보다 며느님이 먼저 약을 드셔야겠습니다"라고 권했을 때, 어머니는 그저 엷은 웃음으로 "다음에요..." 하며 말을 자르셨다.

그 짧은 거절 속에 나의 존재 가치는 다시 한번 지워졌다.

스스로 바보 같은 선택을 했다는 자책과 결혼에 대한 후회가 밀려와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다.


는 절망과 억울함에 매몰되어 어린 조카를 돌보느라 자신의 미래인 대학 입시조차 뒷전이었던 큰 시누이, 그리고 매일 아침 스스로 도시락을 싸서 등굣길에 올랐던 여고생 둘째 시누이의 고단함 보이지 않았다.


고딕 지구의 벽은 한 시대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자세히 보면 로마 시대의 거대한 돌덩이 위에 중세의 벽돌이 쌓여 있고, 그 위에 근대의 보수 흔적이 덧대어져 있다. 수백 년의 얼굴이 보이는 까닭이다.

가우디의 트렌카디스가 '의도된 타일 조각'의 예술이라면, 고딕 지구의 벽은 '시간이 자연스럽게 깨뜨리고 이어 붙인 역사의 모자이크'라고 할 수 있다. 각기 다른 질감과 색의 벽돌들이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디며 제각기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신을 향한 인간의 찬란한 야망이라면, 고딕 지구는 인간이 인간에게 남긴 상처를 묵묵히 견뎌온 기록이다. 영국의 코벤트리 대성당이 무너진 잔해를 치우지 않고 '화해'라는 이름을 붙였듯, 바르셀로나의 낡은 골목들은 총탄 자국마저 제 몸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고딕 지구의 낡은 성벽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연민 역시 그런 것이 아닐까.


화려한 관광지가 주는 눈부심을 잠시 멈추고, 고딕지구의 오래된 돌들이 수백 년간 견뎌온 고독과 슬픔을 조용히 응시해 본다.

신혼 초 ​그 시절 나의 마음은 그 감옥의 창보다 더 좁고 어두웠다. 나만 피해자라는 생각에 갇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힘든 시절을 함께 버틴 시누이들과 하녀라는 절망감에 빠진 초보며느리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게 된다.


시이모가 어느 날 말했다.


질부도 결혼 잘했지 뭐.

대학교수 부인이 쉽나?


세월은 참으로 얄궂다.
시간이 흘러 남편이 교수가 되자, 주변 친지들은 내게 "결혼 참 잘했다"며 부러움 섞인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그 목소리 끝에는 묘한 빈정거림이 매달려 있다. 마치 내가 아무 노력 없이 운 좋게 '교수 부인'이라는 자리를 꿰찬 것처럼, 그들은 내 현재의 겉모습만 보고 삶을 채점한다.

"너 가난한 집에 와서 고생한 거 다 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결혼 잘한 거 아니냐? 결국은 교수 부인 됐잖아."
​그 짧은 한마디에 나의 억울했던 청춘과 지하방의 눈물은 순식간에 '교수 부인'이라는 결과값을 위한 당연한 과정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고딕 지구의 견고한 돌벽처럼,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겉면에만 머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차가운 돌벽 안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울고 견디며 여기까지 걸어왔는지. 나의 절망과 화해는 타인의 평가가 아닌, 오직 나의 내면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것임을 그 작은 창 앞에서 다시금 깨닫는다.


내가 그토록 몸서리치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은 가난한 지하방도, 산더미 같은 빨래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지워진 채 누군가의 하녀로, 혹은 누군가의 소유물로만 취급받던 그 '인격의 감옥'이었다.


​시어머니의 외면과 시누이의 무심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옥죄던 일상의 이지러짐. 그 모든 것이 창살이 되어 나를 가두고 있었다.
​이제야 나는 그 작은 창을 향해 손을 뻗어본다. 교수 부인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도, 세월이라는 약으로도 다 덮이지 않는 그 흉터를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비록 아물지 않은 상처라 할지라도, 그 시절을 견뎌낸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이 눈부신 바르셀로나의 햇살 아래 서 있음을 이제는 안다.


차가운 벽돌과 쇠창살, 그 좁은 문 안에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나의 슬픔을 이제는 놓아주려 한다. 고딕의 석벽 사이로 스며드는 빛을 따라, 아픔의 기록 대신 화해와 감사의 이야기를 새로 써 내려가기로 했다.


* 사진은 당시 고덕지구에서 직접 찍은 Ai로 생성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