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시대

진주반지와 며느리의 일기장

by 파도타기

나에겐 단 한 번도 손가락에 끼워보지 못한 진주 반지 하나가 있다.

시어머니께 받은 지 어느덧 마흔 해가 다 되어간다.

내 손가락엔 터무니없이 커서 속절없이 빙빙 돌기만 하는 반지. 커다란 진주알을 투박한 장식들이 감싸고 있어, 화려한 한복에나 겨우 어울릴 법한 생경한 물건이다.

사실 나는 반지나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즐기는 편이 아니다. 여름날 목덜미가 너무 훤하다 싶을 때 목걸이 하나를 걸치는 게 고작이다. 그런데도 이 반지라는 고약한 물건은, 가끔 꺼내 볼 때마다 사람의 마음을 헤집어 놓는 묘한 구석이 있다.


결혼 예물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선물은 주고받지도 못했다. 시어머니가 건네신 70만 원과 친정에서 보탠 130만 원, 그 보잘것없는 액수가 우리 시작의 전부였다.

그 안에서 남편의 시계를 챙기고, 나를 셋째 딸이라 아껴주신 양어머니가 보내주신 18k 반지 한 쌍이 우리가 가진 예물의 전부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화려한 프러포즈로 보석반지를 받는다지만, 나는 시어머니나 남편에게 풀꽃 반지 하나 받아보지 못한 채 아내이자 며느리가 되었다.


늘 마음 한구석엔 어머니께 예물 한 점 드리지 못한 송구함이 맺혀 있었다. 그래서 큰아이의 백일 반지와 돌 반지를 선뜻 꺼내 녹였다. 두 돈 남짓한 금을 가져가 실반지 대신 넓고 얇게 펴달라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더 귀해 보이고 번듯해 보이고 싶었던 며느리의 정성이었다. 이미테이션 장신구만 가득하던 어머니의 보석함에 진짜 금빛을 채워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누이가 금반지를 선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반지계를 통해 마련한 귀한 한 돈이었다. 5만 원이면 금 한 돈을 사던 시절이니 지금의 가치로 따지면 소박한 선물일지 모르나, 당시의 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우리 며느리 예물도 못 해줬는데'라는 미안함이 어머니에겐 없으셨던 걸까. 자식의 돌반지를 녹여 정성을 바친 며느리의 진심보다, 딸에게 줄 금붙이 한 돈이 어머니에겐 더 중했던 모양이다. 그 당연한 내리사랑 앞에서 나는 철저히 타인이 된 기분이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해 휘갈겨 쓴 일기장엔 독설이 가득했다. 시어머니를 향해 '허영심에 눈먼 노인'이라 퍼부었던 그날의 문장들을 복기해 본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때 시어머니는 마흔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지금 내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린 그녀를, 나는 어째서 노년의 프레임 속에 가둬버렸을까. 며느리에게 반지 하나 내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테이션 반지를 즐기던 젊은 여인은 졸지에 노망 난 노인이 되어 내 일기장에 박제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마주한 그 기억이 참으로 민망하고도 우습다


어린 시절의 나는 원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부당함을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억울함이 차오르면 그저 꾹꾹 눌러 담으며 도망갈 구멍을 찾을 뿐이었다. 싸우다 다칠 내 모습도 걱정됐지만, 억눌러온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을 때의 내 모습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속상한 일이 생기면 빈 종이 위에 사람의 얼굴을 만화처럼 그리곤 했다. 화내고 찡그리고 우는 표정들로 내 마음을 대신 쏟아내다 보면, 어느덧 종이 위 얼굴들도 서서히 웃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렇게 낙서로 화를 다스리다 도저히 감당 안 되는 날엔 일기를 썼다. 마구 쏟아낸 글 끝엔 묘하게도 상대에 대한 미안함이 고개를 들었고, 나는 그 미안함을 덮으려 공연히 상대에게 더 살갑게 굴곤 했다.


그때도 나는 그저 끓어오르는 화를 일기장에 쏟아내며 다스렸을 뿐이다. 그런데, 아뿔싸. 큰 시누이가 그 일기장을 읽은 모양이다.

가장 은밀한 수치를 들켜버렸다는 당혹감에 몸서리쳤고, 곧 몰아닥칠 풍파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잠을 설쳤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머니도, 남편도, 시누이조차 입을 굳게 다물었다. 세상은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겁고 고요한 침묵 속으로 침잠했다.


며칠 뒤, 어머니는 반지를 내미셨다. 커다란 진주알을 유리 장식이 감싸고 있는 반지였다. 내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은 내 취향도, 손가락의 굵기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생경한 물건이었다. 어쩌면 당신의 것을 사셨다가 슬그머니 내어주신 건 아닐까. 들켜버린 서운함을 서둘러 봉합하려 급조된, 마치 속이 텅 빈 '가짜 반지'처럼 보였다.

내게 간절했던 것은 손가락 위에서 번쩍이는 과시용 진주가 아니었다. 내 아이의 돌반지까지 녹여 당신의 손에 기꺼이 끼워드렸던 그 지극한 정성을, 그저 '고맙다, 고생했다'는 다정한 말 한마디로 알아주는 '마음의 반지'였다. 이미 시들어버린 마음 위에 얹어진 진주는 그저 차갑고 무겁기만 했다.


아마도 시누이는 내 일기 속 절절한 사연을 차마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정의 평화를 생각하는 그녀라면 그저 '언니에게 반지 하나 선물하라'며 부드럽게 권했을 터. 그 깊은 속내를 이제야 헤아려 본다. 늦게나마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겠다


그날 이후, 그 반지는 단 한 번도 내 손가락을 찾지 않았다. 장신구의 소명을 잃은 채 서랍 한구석을 지키던 그것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증거'였다.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늘 헐거웠던 그 진주반지. 하지만 세월은 날 선 통증을 무디게 했고, 이제 그 반지는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빛바랜 서랍을 열 때마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잊지 못할 삶의 한 조각이 되었다.


이제는 금 한 돈 돌반지 하나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시대다. 아이의 백일이나 돌을 축하하는 마음조차 주머니 사정을 먼저 살피게 되는 부담스러운 세상이 된 것이다.

내 손가락에서 수십 년을 함께하며 세월의 때가 묻은 둘째 아들의 돌반지를 꺼냈다. 금거래소에서 이 묵직한 기억을 새 아기 반지와 맞바꾸어 이제는 손주들에게 보낸다. 내 손을 떠난 금붙이가 대를 이어 사랑으로 전해지는, 참으로 소중한 재산이다.


당시 금 한 돈은 고작 5만 원이었다. 그사이 값어치가 스무 배나 훌쩍 뛰었으니, 내 정성의 무게도 그만큼 무거워져야 마땅할 텐데 참으로 야속한 세상이다.


장신구 보관함을 뒤적이다 보니 제법 묵직한 금붙이들이 손에 잡힌다. 덕분에 스무 배의 가치를 담아 선물할 수 있게 되었다. 14k 반지 두 개를 모으니 번듯한 금 한 돈 반지가 된다.

낡은 상자 속 빛바랜 조각들조차 이제는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재산이다


아이의 돌반지를 녹여 어머니께 드렸던 그 뜨거웠던 진심도, 40년을 서랍 속에서 겉돌던 차가운 진주반지도 결국은 사랑받고 싶었던 어린 날의 투정이었을지 모른다.


부담 없이 주고받던 순수한 마음들이, 이제는 혹여 비루한 주머니 사정을 들킬까 전전긍긍해야 하는 서글픈 세상이 되었다.

그간 금값은 스무 배가 올랐고, 내 마음의 키는 그보다 조금 더 자랐다. 40년 전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 서글픈 고백은, 이제 빛바랜 서랍을 열 때마다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가장 귀한 삶의 조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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