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옹지마
교사들도 성과상여금을 받는다. 1999년 무렵 시작된 이 제도는 교직 사회에 커다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교육은 그 성과를 단기적이거나 객관적인 수치로 평가할 수 없다는 본질적인 회의론과, 그 평가 결과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부딪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동료 교사들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하고 사기를 꺾는다는 이유로 전교조를 비롯한 많은 교사가 거세게 반대했다. 성과급을 거부하고 반환하거나, 받은 금액을 다시 모아 똑같이 나누는 'N분의 1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지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며 등급 간 비율 조정과 구성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평가 항목 개정 등을 거치며 제도는 어느덧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다.
당시 성과급의 평가 주체는 각 단위 학교였다. 학교별 평가위원회가 수립한 기준이 그해 교사들의 '성적표'를 좌우했다. 그 무렵 나는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2년간 교환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수업 개선 연구학교라는 막중한 소임으로, 1년에 무려 네 차례나 공개수업을 치러내야 했다. 교실과 학교 환경 구성부터 수업 연구까지, 그야말로 영혼을 갈아 넣으며 애썼던 시간이었다.
성과급 평가 항목에서 '공개수업 횟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였기에, 내심 정당한 보상을 기대했다. 하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결과는 뜻밖에도 'C등급'이었다.
이유는 명백하고도 허망했다.
내 급여는 서울의 본교에서 지급되고 있었고, 성과급 역시 본교 평가위원회에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몸 담고 헌신한 학교에서는 평가권이 없었고, 내 소속인 본교에서는 내가 학교를 위해 한 일이 없으니 C를 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2년 연속 C등급을 받았다. A등급과 C등급 사이의 커다란 금액 차이보다 더 아팠던 것은, 나의 땀방울이 서류상의 '소속'이라는 벽에 부딪혀 증발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속이 상했지만,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울 본교로 복귀한 뒤, 나는 '수업개선 연구교사'에 도전했다. 당시 연구교사에게는 연간 100만 원, 이듬해에는 200만 원의 연구 지원비가 책정되어 있었다. 사실 내가 이 활동에 뛰어든 이면에는 오기가 섞인 결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기도에서 그토록 헌신하고도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 성과급을, 내 실력으로 직접 확보해 보겠다는 다짐이었다.
연구교사의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1년 동안 여러 차례 수업을 공개해야 했고, 그 모든 과정을 치밀한 연구 보고서로 작성해 서울시 교육청에 제출해야 했다. 게다가 공개수업은 까다로운 심사위원들의 안목을 통과해야 했으며, 보고서 또한 엄격한 평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지난 2년의 시간이 있었다. 경기도 수업개선 연구학교에서 연 4회씩 혹독하게 치러냈던 공개수업의 경험은, 어느덧 내 몸에 단단한 근육으로 남아 있었다. 남들은 고개를 내젓는 고된 일정이 내게는 그리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억울함에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의 'C등급'이, 역설적으로 나를 가장 숙련된 '수업 전문가'로 키워낸 셈이었다.
이러한 연구교사 활동은 내게 두 가지 귀한 열매를 안겨주었다. 매년 안정적인 성과상여금 A등급을 보장받았고, 우수한 평가 결과는 고스란히 연구 점수로 쌓였다. 결과적으로 그 시절의 분투는 나를 승진의 대열로 당당히 이끌어준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옛 중국 북방 국경 근처에 살던 한 노인의 말이 도망갔다가 더 많은 말 무리를 이끌고 돌아오고, 그 말 때문에 아들이 사고를 당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부상 덕분에 전쟁 징집을 피하게 되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했다.
'변방 노인의 말'이라는 직역을 넘어, 이 말은 길흉화복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꿰뚫는 지혜를 담고 있다. 지금 당장의 결과가 '복'인지 '화'인지, 혹은 '행운'인지 '불행'인지 성급히 예단할 필요가 없다는 삶의 태도를 일깨워준다.
나는 살아가며 예기치 못한 시련이나 억울한 일을 당할 때면 늘 '새옹지마'를 떠올린다. 당장의 불행에 매몰되기보다, 이것이 가져올 다음 기회를 기대하며 희망을 품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수업개선 연구교사 활동은 나에게 단순한 점수 이상의 '자신감'을 선물했다. 한때 앞서가는 후배들의 수업을 보며 위축되기도 했지만, 연구교사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치열하게 돌아보며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다.
지원금으로 장만한 다양한 수학교구들은 교실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아이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고, 수업 참여도와 학습 성과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나의 배움과 자원은 교실 담장을 넘기도 했다.
학급 아이들을 위해 준비했던 수학교구들을 들고 동순동 빈민가의 아이들을 찾아갔다.
여름성경학교 대신 열린 '수학놀이 교실'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 즐기며, 내가 가진 것을 나누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때의 연구교사 활동은 내게 단순히 점수를 따는 과정 그 이상이었다. 지원금으로 들여온 조노돔 시스템, 폴리드론, 패턴 블록, 퀴즈네르 막대 같은 교구들은 아이들에게 '수학은 머리 아픈 것'이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는 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분수의 개념을 어려워하던 아이들이 원형 분수와 막대 분수, 퀴즈네르 교구를 직접 조작하며 무릎을 치던 순간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기억에 남는 제자가 한 명 있다.
평소 수학 점수가 20점에 불과해 자신감을 잃었던 초등학교 5학년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가 내가 운영하는 수학 놀이 교실에 오기 위해 좋아하던 태권도 학원까지 빼먹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보고, 만지고, 직접 만들어가는 수학의 매력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동순동 빈민가 아이들을 위한 수학 교실은 교회 공동체의 헌신이 더해져 더욱 풍성했다.
교인들은 아이들을 위해 고기를 듬뿍 넣은 카레와 갓 튀긴 치킨을 정성껏 준비해 주셨고, 간식으로는 시원한 수박과 아이스크림이 끊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태권도 대신 나를 찾아온 이유가 과연 그 정성 가득한 점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손끝으로 깨우쳐가는 수학의 재미 때문이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어쩌면 그 아이들에게 필요했던 건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위해 정성을 쏟고 있다는 따뜻한 '관심'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활동은 나 혼자만의 분투가 아니었다.
교대생인 아들과 아들의 친구, 그리고 근처에 사는 경기도 현직 교사가 뜻을 모아 함께 20여 명의 아이를 보살폈다. 아침 10시 시작이었지만, 아이들은 이미 9시부터 교회 문을 두드렸다. 오후 3시가 되어 수업이 끝나도 아이들은 좀처럼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함께 놀아주는 교회 청년들의 온기가 그만큼 좋았던 모양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는 수학 점수 20점이라던 그 5학년 학생이다. 아이는 교구로 원리를 깨친 뒤 어려운 문제를 막힘없이 풀어내더니, 답란에 '10분의 5'라고 정성껏 적어 넣었다. 구구단을 다 외우지 못해 약분을 하는 법을 아직 몰랐던 탓이다.
‘조금만 더 곁에서 가르칠 수 있다면 이 아이가 수학을 포기하지 않을 텐데….’
못내 안타까운 마음이 앞섰지만, 기적은 일어났다.
그 아이는 다음 시험에서 70점을 맞았다며 내게 달려와 환하게 웃으며 자랑했다. 20점이던 아이에게 70점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생애 첫 자신감의 증표였을 것이다.
나의 ‘새옹지마’는 이번에도 틀리지 않았다. 당시엔 고통이었던 경기도에서의 시간이 교사로서 나를 성장시킨 동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70점을 맞고 환하게 웃던 아이의 표정은, 억울한 등급에 매몰되어 있던 나를 일깨워준 귀한 선물이었다.
삶의 파고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걷다 보면, 오늘의 시련이 내일의 복이 되는 신비로운 순환을 다시금 마주하게 될 것을 믿는다.
*사진은 실제 수업에서 사용했던 수학교구 중 퀴즈네르와 조노돔시스템으로 쿠팡사이트에서 캡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