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난 용

나의 개천이야기 7- 고마운 선생님들

by 파도타기


나를 개천에서 일으킨 사람들은 고등학교 선생님들이다.
내가 교육, 교육을 외친 까닭도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중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한 서점에서 점원을 하느라 고입 체력장 접수 날짜를 몰랐다.
1975년 9월 추석을 지내면서 난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결심했고 부모님과 사장님께 말씀드렸다.

사장님은 참고서를 마음껏 가져가라 하셨고, 그 참고서로 도서관에서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매일 공부했다.
그러다 체력장 생각이 났고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이미 접수가 끝났다고 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고등학교에서 말단 기사, 일명 소사로 일하셨다. 진작 말했어야 했다고 또 꾸지람만 들었다. 20점. 난 그 20점을 잃고 시작해야 했다.

체력장만 봤어도 장학생으로 입학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도 그 입학금이 내가 고등학교에 낸 학비의 전부이다. 어쩜 다행인지도 모른다. 세 세상으로 이끈 학교를 무료로 다녔다니....
학비만 무료가 아니었다. 외부에서 장학생 추천이 오면 모두 내 차지였다.
AMK 청주공장 공장장이 주는 장학금으로 매월 1만 원씩 받았고,
국제스타킹과 여학생 잡지사에서도 1년 동안 장학금을 주었다, 그리고 장학생들을 서울로 초청해서 다락동 캠프에 참가하는 영광도 누렸다.

아버진 내가 충청북도에서 유일하게 뽑힌 장학생이라며 '여학생'잡지에 난 사진과 이름을 친구들에게 자랑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내가 충청도에서 제일 잘났다고 술에 취해서 웃으며 자랑하기를 좋아하셨다.
사실 가정환경이 조건이었을 텐데...
그렇다고 내게 직접 칭찬하지는 않으셨다. 당신의 자랑거리일 뿐,

무엇보다 미술선생님들은 학교직원들이 다 알만큼 날 아끼셨다.

김수진, 너 미술선생님 잊지 마!

졸업식날 행정실에 가서 마지막 인사를 하자 들은 말이다.

내게 미술선생님은 두 분이시다. 두 분 다 홍대 출신인데,
1학년 때는 한국화를 하시는 박 선생님이시고 2학년때는 서양화를 하신 유 선생님이시다.

박 선생님은 나를 운동장 정원 바위에 앉히고 '인생은 입체적으로 살아야 한다'며 미술반에 들어오라 하셨다. 당시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공부만 하는 인생은 편협적 삶을 살 수 있으니 그림을 그리면서 여유 있고 풍성한 심성으로 멋지게 살라는 말로 이해했다.
그렇게 미술반이 되었고 사군자를 선생님께 배웠다.
유 선생님은 수채화와 디자인으로 구성을 기르쳐주셨다.
미술반 누구나 다 같은 것을 배웠지만, 유독 내게는 특별했다. 더 가난했고 공부를 좀 더 잘했다는 이유였을까?

유 선생님은 독신 여선생이었는데, 점심시간마다 날 부르셨다. 혼자 먹기 싫다며 자장면을 두 개 시키셨다.
도시락이 부실한 나를 배려한 일이다.
그런 모습을 종종 본 행정실 직원들이 유 선생님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졸업 이후 난 한 번도 유 선생님을 찾아뵙지도 전화도 못했다. 지금도 뵙고 싶고 좋은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아무도 연락처를 알지 못한다.

상업고등학교 특성상 취업은 대학입시만큼 중요했다.
3학년이 되자 곧바로 취업전쟁이었다.
부기부, 타자부, 주산부 아이들이 벌써 어느 대기업에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로 심란했다.
난 타자나 주산이 이 친구들보다 낫지 않았다. 물론 부기 2급, 주산 1급, 영타자 3급으로 기본은 되었으나 선수들과 달라서 걱정을 했다. '9급 공무원이나 할까 ' 하던 중에 우리 학교가 삼성공채에 4명을 추천받았다고 했고 내가 포함되었다.

시험과목은 영어와 상식이었고 시험은 6월 3일이었다.
우리 4명은 곧바로 학교에서 숙식을 하며 시험 준비를 했다. 역시 학교와 선생님들의 배려다.
상업 선생님과 영어선생님이 직접 지도하셨다. 특별 무료 과외다.

당시 대학졸업자들이 보는 상식책을 샀다. 그 두꺼운 책을 다 외웠다.
영어 선생님은 하루에 영어 동화책 한 권씩을 읽게 하셨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도 그때 원서로 읽었다.
요즘은 상상할 수 없는 특혜다. 그게 한 달이었는지 10일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덕분에 3명이 삼성공채에 합격했고. 8월 4일 삼성물산, 삼성전자. 그리고 나는 삼성생명의 전신인 동방생명 본사 기획관리실에 배정되었다.

개천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대기업 본사로 신분 상승하는 순간이다.
난 시청 앞 본사 21층에서 근무했고 26층인지 28층엔 이병철 회장실이 있다고 언니들이 말했다.

박 선생님은 겨우 1년 미술을 가르치셨고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셔서 취업에 도움을 주지 않으셨지만, 취업 선물로 직접 작품 두 점을 그려서 선물하셨다.

위 김수진 양
무오년 하
송계

라는 글과 낙관을 찍은 매화도와 가재 그림이었다.
매화도는 지금 우리 집 거실에 걸려있으나 가재는 한자로 쓰인 글을 자세히 읽지 않고 그저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고등학교 시절 짝사랑하던 교회 전도사님 결혼 선물로 드렸다.
늦게사 글을 확인하고 '아뿔싸, 이건 아닌데 어쩌나? ' 했다.
부끄러운 일이다.

난 회사에 다니면서 여름휴가도 청주의 박선생님집에서 보냈다. 집 2층은 화실이었는데 거기서 선생님 그림을 구경하고 설명을 듣고, 또한 매화 치는 것을 배우고 잠도 잤다.
식사 때는 중학생 아들에게 내 자랑을 하시면서 `누나가 그리 공부를 잘했단다` 하며 칭찬하셨다. 우리 아버지보다 더 자랑스러워하셨고 사모님도 친절하게 대하셔서 나는 부산 해운대 가는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다.

그 박 선생님이 바로 결혼 예복에 시원한 모란을 쳐 주시면서 모란은 부귀, 영화를 상징한다며 복을 많이 받아서 잘 살라고 덕담해 주신 분이다.


선생님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하셨다.
한복에 그림을 그려준 제자는.

선생님과는 졸업 후에도 종종 만나 뵈었다. 인사동에 선생님 화실이 있었고 서울에서 전시를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박 선생님은 훗날 동생을 내게 소개해주셨는데,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와 결혼하면 평생 선생님의 제자로 그림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


그러나 그런 이유로 결혼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서 H 대학을 나와 은행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당시 금메달리스트 유도선수처럼 키가 크고 미남이었으며 건강해 보이는 참 신실한 사람이었는데...

결혼생활이 너무 힘든 시기에는 가끔 생각나기도 했다. 내 발등을 내가 찍었지. 하며,

♡ 처음 그림은 스킨답서스 이며,

아래 그림은 스파티필름이 있는 내방 서랍장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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