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언제 가장 행복하셨을까?
엄마는 언제 가장 행복하셨을까?
돈을 펑펑 벌어들였다던 그 방앗간 시절, 지하수 한 바가지로 배를 채우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동, 영양 부족으로 골다공증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달렸던 그 시간들이 행복했을까?
양육과 살림, 시부모 봉양이라는 무거운 짐을 여고생 둘째 딸에게 맡기고,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의 폭력을 묵묵히 받아내야 했던 그 처절한 생존의 기록이 과연 엄마의 전성시대였을까?
엄마는 종종 그때 하루에 얼마를 벌었는지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랑하곤 하신다. 살면서 그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었다.
군부대에서 고추를 몇 가마니씩 가져오던 시절이었어. 방앗간 바닥에 고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겠니?
하루 매상이 십만 원을 훌쩍 넘기던 날도 많았어.
대기업 다니는 큰딸의 한 달 월급을 단 하루 만에 손에 쥐던 그 희열이 엄마에게는 얼마나 컸을까.
주덕에서 살 땐 어땠을까?
아버지는 노년에 엄마를 각별히 챙기셨다.
함께 농사를 짓고 여행을 다니던 그 시절은 엄마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장 파열로 장루를 달고 생활하게 되면서, 언어폭력을 다시 시작하였고, 끝내 요양병원에서 식물로 사시다가 떠나셨다. 엄마의 마지막 자부심이었던 그 시절의 기억조차 모진 험담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아버지가 떠나시고 엄마는 비로소 경제권을 찾았다.
연금을 모아 목돈을 만들고 자식들에게 나눠주셨다.
엄마집을 찾는 자식들의 차 트렁크에 이웃집에서 산 감자와 옥수수, 마늘을 실어 보내며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부자가 된 듯 웃으셨다.
투박한 손으로 쑤어낸 도토리묵과 팥죽, 정성으로 지은 대보름 찰밥, 텃밭에서 사계절 기른 채소들은 자식들에게 미안했던 세월을 갚아가는 엄마만의 방식이었다. 주는 기쁨에 흠뻑 취해 지내셨던 그 시절, 그것은 분명 엄마가 맞이한 생의 가장 뜨거운 전성기였다.
세월은 야속하게 흘러 엄마의 몸에도 병이 깊어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나눌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 예상치 못한 낙상 사고는 엄마를 요양원이라는 낯선 곳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엄마의 전성시대는 저무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요즘, 엄마는 그곳에서 또 다른 전성기를 맞이하고 계신 모양이다. 매일 걸려 오는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자랑이 줄을 잇는다.
늘 기운 없는 목소리로 어디가 아프다, 약을 먹었다, 어지러우니 육회를 먹으러 나가자던 예전의 엄마가 아니다.
팀장님이 나더러 어쩜 이렇게 글씨를 잘 쓰냐고,
내가 쓴 글을 사무실에 가져가서 붙여놨는데 벌써 소문이 다 났대. 영양사도 와서 한참을 칭찬하고 가더라. 그림도 그렸는데 간호부장이 너무 잘 그렸대. 색을 어찌나 곱게 칠했는지 내가 1등이라더라.
글 쓴 건 100점이래, 100점!
엄마는 이 나이에 100점이 다 무슨 소용이냐며 소리 내어 웃으신다. 하지만 그 웃음소리에는 평생 남을 위해 방앗간 불을 밝히고, 남편의 무시와 폭력을 견디며,
자식 뒷바라지에 쏟아부었던 세월 끝에 비로소 찾아온 '진짜 나'를 향한 환희가 담겨 있다.
사실 엄마에게 요양원은 처음부터 전성시대가 아니었다. 낯선 곳에 던져진 엄마는 한동안 길을 잃고 헤매셨다.
다들 치매 환자들인데 나만 멀쩡하다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라고 절규하셨다. 이미 팔아버린 집을 그리워하며 돌아갈 곳 없는 신세를 한탄하고, 잘 사는 아들이 있다면 의지하련만 딸자식에게는 짐이 될까 봐 눈치만 보인다며 속상해하셨다.
그 불안은 결국 주변 환자들과의 갈등으로 번졌고, 참아왔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 요양원 측에서는 '분노조절장애'라는 서늘한 이름을 붙이며 약물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히 반대했다. 엄마의 분노는 병이 아니라, 삶의 자리를 잃어버린 인간의 당연한 저항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정신과 약물도 허용하지 않은 채, 나는 엄마에게 영양제를 챙겨드리고 꼭 필요한 처방약만을 고집하며 엄마의 정신을 맑게 지켜내려 애썼다.
나는 요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그저 밥을 가져다주는 물리적 돌봄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분이다. 엄마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사람과 마음을 나누는 '정서적 지원'이다. 다른 환자들의 식사를 돕고 기저귀를 갈아주는 시간의 절반이라도, 엄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요양원의 모든 프로그램에 일절 참여하지 않은 채, 닫힌 방문 뒤에만 머물러 계셨다. 나가서 또 환자들과 갈등하는 일이 두려우셨던 것이다. 그런 엄마가 어느 날 팀장님께 먼저 말을 건네셨다.
나는 글공부를 하고 싶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다시 마음을 열겠다는 엄마만의 용기 있는 선언이었다.
결국 요양원 측에서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만을 위한 1:1 정서적 지원 프로그램이 마련된 것이다. 방 안에 갇혀 분노와 고립감을 삭이던 엄마는, 그렇게 펜을 잡고 붓을 들며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
이제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는 소녀처럼 들떠서 봄 햇살처럼 환하다.
한때 길을 잃었던 그곳에서, 엄마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100점짜리 성적표'를 들고 당신만의 진짜 전성시대를 써 내려가고 계신다. 젊을 때도 아니고 이제야 100점 맞으면 뭐 하냐며 웃으시지만, 그 웃음은 늘 뒷자리에 머물며 살아온 당신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눈부신 훈장이다.
요즘은 딸이 고기를 사드리러 가겠다고 해도 손사래를 치신다.
아니다, 나 할 일이 많다. 한문도 써야 하고 주기도문도 써야 해. 그림도 그려야 하니까 나중에 오너라.
엄마는 나처럼 그림을 그리고 기도문을 쓰기 시작하며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으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쾌활한 목소리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그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엄마의 또 다른 전성시대가 드디어 시작된 것만 같아서.
마침 며느리가 꽃이 활짝 피었다며 꽃구경을 가자고 청해온 모양이다.
엄마, 그럼 딸은 꽃이 더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갈게요.
꽃보다 환하게 피어난 엄마의 이 전성시대가 부디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그 100점짜리 성적표가 엄마의 남은 생을 온통 봄햇살로 채워주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