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척 동생의 아기 돌잔치에 참석했었다. 돌잡이의 백미는 역시 ‘돌잡이’이다. 실이나 붓, 판사봉, 청진기 등의 전통적인 물건은 물론, 마이크나 마우스 등도 최근 돌잡이 판의 단골이다. 부모들의 원픽(?)은 뭐니뭐니해도‘돈’인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설사 그날의 주인공이 부모들의 기대를 져버린다하더라도, 참석자들 모두는 아이가 골라든 돌잡이 물건이 상징하는 직업과 연계해서 아이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해 준다. 언제부터 내려오는 전통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생애 첫 생일을 맞은 아이의 선택이‘일과 직업’에 관련되었다는 점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다. 그리고 그 앙증맞은 선택의 결과물을 가지고 합리적 근거 없이 그 아이의 인생을 점쳐보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아이가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무렵, 그는 진짜 직업을 결정하기 위해 인생에서 가장 큰 고민에 휩싸이기도 한다. 도전과 좌절, 고민을 반복하며 성인으로서 일을 시작했다면, 이번엔 배우자를 얻기 위해 가장 먼저 상대방이 어떤 일을 하는지를 궁금해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평생을 마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갈 때쯤 남겨진 사람들에겐 어떤어떤 일을 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곤 한다.
“왜 일을 하십니까?”
노동과 관련된 교육이 시작될 때 강사들이 흔히 묻는 질문 중 하나이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다수 교육생의 답변은 “먹고 살기 위해서” 또는 “생계유지”였다. 그리고 희소하지만 “자기개발”또는 “보람” 등의 용어가 언급되면, 그 뒤에는 항상 다른 이들의 비웃음이 뒤따랐다. 어쩌다가 노동이 이런 취급을 받게 되었을까? 첫 돌때부터 시작하여 일생을 다하고 영면에 들 때까지 그 사람의 행복과 일생을 평가할 때 가장 큰 지표로 활용되는 것이‘일’아니었던가? 단순히 생계유지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노동에 우리는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부여받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왔던 것인가?
여기서 잠깐 시대를 거슬러 ‘노동’의 의미를 살펴보자. 중세봉건사회에서 ‘노동’은 곧 신분을 나타냈다.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로 화폐경제가 확립되면서 신분행위로서의 노동은 무너지고,‘신분’이 아닌 ‘계약’관계에서 ‘노동’이 거래되기 시작하였다. 영국의 비교법학자 헨리 메인(Henry Maine)은 그의 저서 『고대법』(1861)에서 중세적 신분질서사회로부터 근대적 계약질서사회로의 전환을 ‘신분에서 계약으로’라는 말로 함축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량의 증가와 함께 노동은 노동자가 가진 임대 가능한 상품으로 취급된다. 그들의 사용자에게 일정 시간 동안 노동자의 자율성과 자유시간을 내어주고, 그에 대한 대가로 임금을 지급받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의 제공과 임금의 상호교환은 근대시민사회의 대등한 계약관계의 원칙 아래에서 성립되긴 어려웠다. 필연적으로 노동력의 제공은 인격과 결부되어 있으며, 임금은 노동자의 생계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대등적‘종속성’의 문제는 노동법의 등장 배경이기도 하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선언(1944)에서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라고 천명한 것도, 산업화 이후 단지 하나의‘노동력 제공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의 노동자’의 인간존엄 회복에 대한 요청이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노동을 제공하는 형태와 방식은 많은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국가와 사회마다 그 수준과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보호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일과 생활 균형’, 이른바‘워라밸’을 존중하고 지원하고자 하는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일이 아닌 다른 측면에서 삶의 만족감을 느끼고 이를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문화는, 인격체로서의 노동자 존중 관점에서 분명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워라밸’은 그간 직장과 일에 치우쳤던 삶의 무게를 일상과 여가로, 가치의 중심축을 전환시키고자 한다. 다만‘워라밸’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일상시간을 일터 안과 밖으로 구분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일터 밖에서의 행복과 시간을 동경한다. 일과 생활에서의 에너지 분배를 강조하지만, 방점은 노동 이외의 삶에 찍혀있다. 기울어진 일상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시도이지만, 제도의 취지만큼 노동자 개인의 삶에서 일과 생활이 균형이 맞춰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혹여나 완벽하게 균형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 일상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덴마크의 철학자 모르텐 알베크(Morten Albæk)는 『삶으로서의 일』(2021)에서 워라밸에 대해 사람의 삶의 각 부분이 전혀 다른 것인 양 시간을 쪼개어, 삶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요구를 유발하도록 정당화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일터 안과 밖의 ‘나’가 다른 사람이 아님을 지적하며, “오직 한 사람이다. 당연히 삶 전체를 통해 발전해 나가야 할 한 명의 인간”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삶의 일부로서 일을 받아들여, 개인적으로는‘일의 의미’를 찾도록 노력하고, 조직에서는 구성원들에게 ‘일의 의미’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경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대변화에도 불구하고‘노동’은‘노동자’의‘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현실이고 사실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노동의 본질적 목적이다. 다만 그러한 본질은 오히려‘노동’으로 인해 잃기 쉬운 노동자의 인간존엄을 실현하고 존중해야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자칫하면 노동자는 인간성을 잃고 생계유지를 위한 생산성의 도구로 스스로를 평가절하할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노동의 본질과 노동을 바라보는 지배적 관념에도 불구하고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함께해야 할 운명과 같다. 일터의 시간은 애써 외면한다고 나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노동은 도려낼 수 없는 우리 삶의 일부이다. 어쩌면 우리의 노동은 일생을 통해 인간존엄을 실현하는 의미 있는 과정으로 바라봐주기를 우리에게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