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질량보존의 법칙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원칙에 따라, 불자는 동물의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꽤 오래전 읽은 책이긴 하지만,『화(Anger)』에서 틱낫한 스님은 그 원칙을 절대적인 금기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고기를 먹어도 되는 조건을 이렇게 제시한다.
“당신이 그 동물을 죽이지 않았고 (If you did not kill the animal,)
그 동물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으며 (If you did not see it killed,)
그 동물이 특별히 당신을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면 (If the animal was not killed specifically for you,)
그 고기를 먹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Then it is said that eating that meat is acceptable.)
스님은 무엇보다 고통과 분노로 가득 찬 공장식 축산의 동물들이 남긴 감정이
고기를 먹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타자의 고통에 대한 자각”과 “마음의 수련”을 함께 이야기하며,
음식뿐 아니라 감정의 에너지 또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나는 학창 시절 과학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았다.
대학과 사회생활에서도 인문·사회 계열의 공부와 일로만 주로 인연을 이어왔다.
그러다 보니 과학 공식은 그저 시험을 위한 암기로 지나갔다.
그럼에도 묘하게 - 아마도 강력한 주입식 교육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으나 -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공식이 있다.
바로 ‘질량보존의 법칙’이다.
“어떤 화학반응이나 물리적 변화가 일어나더라도, 전체 질량은 변하지 않는다.”
즉, 반응 전의 총질량은 반응 후의 총질량과 같다는 것이다.
사회생활 경력과 경험이 누적될수록,
'질량보존의 법칙'이 중학교 과학책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오고 가는 화와 분노, 괴롭힘 등 악하고 부정적 감정에도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보기엔 화와 분노 역시 질량을 가진 에너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부모에게서 자녀에게, 상사에게서 부하에게,
혹은 낯선 민원인과 상담원에게로까지 화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옮겨 다닌다.
한 사람의 분노는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고,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간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한다.”
옛 속담은 바로 그 전이의 연쇄를 말하는 것이다.
결국, 세상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분노가 움직이고 있다.
직접적인 폭발로, 혹은 조용한 내면의 침잠으로.
누군가는 그 화를 되받아치고,
누군가는 꾹 참고 “화를 삭인다.”
하지만 ‘삭인다’라는 말의 본뜻은 단순히 ‘참는다’가 아니다.
감정을 '삭이'는 것과 음식을 '삭히'는 것 모두
'삭다'라는 어원에서 출발되었다.
'삭다'는 시간의 경과나 자연적 변화로 어떤 상태가 완화되거나 부드러워지는 과정을 말한다.
사람의 감정을 스스로의 의식적 노력에 의해 가라앉히는 것이 '삭이는 것'이고,
음식을 발효시키거나 썩게 만드는 것이 '삭히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다만 삭이는 것이든, 삭히는 것이든
다른 사람의 화와 분노가 내 몸속에 들어오면
그 화를 다스려 발효시킬 수도 있고, 썩힐 수도 있다.
같은 ‘분해’의 과정이지만,
발효는 생명을 익히고 깊게 만드는 변화이고,
썩음은 생명을 잃고 무너뜨리는 변화다.
분노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상 어느 누군가로부터 발생한 화와 분노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옮겨 다니고,
그 부정적 감정을 제대로 발효시키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썩혀,
마음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사람들에게 침전되다가
결국은 그 내면에 균열을 내고, 균열된 마음의 틈이 임계점을 넘으면
자멸하고 붕괴한다.
세상의 전체 무게는 변하지 않는다.
분노란 존재는 사라지지 않고,
단지 형태를 바꿀 뿐이다.
한 사람이 세상의 화를 모두 다스리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화와 분노를
어떻게 발효시키느냐에 따라
나는 물론이거니와,
몇 단계, 몇십 단계의 연쇄다리를 건너,
내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로부터 시작된 화로 인한 파멸을 막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