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자의 고민의 깊이와 길이에 대한 생각
"때로 생각을 어디까지 깊게 들어가야 할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
대표님과의 1:1 미팅에서 고민의 깊이에 대한 애로사항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연역적으로 사고하고, 가설을 명확히 하며 논리적 사고를 계속해서 연습하고 있지만, 때론 이 고민의 깊이가 어디까지 이어져야 할지를 확신하지 못했다. 돌아온 대표님의 대답은 명쾌했다.
"시간도 비용이라는 걸 생각해봐. 그리고 문제 정의도 중요한데 문제 정의 이전에, 이 문제가 어디까지 들어갔다 나와야 할 문제인지, 무게감부터 생각해봐도 좋고."
스타트업에선 모든 자원이 부족하다. 인력도, 돈도, 그리고 시간도. 그런데 보통 우리 조직/팀엔 인력이 없거나 예산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다.
이때의 시간이 비단 프로젝트 마감일, due 까지의 남은 잔여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만약 1개의 문제를 풀 시간에 2개의 문제를 풀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시간을 아낀 셈이다. 거꾸로, 2개의 문제를 풀 시간에 1개의 문제를 풀었다면 시간을 잘 운영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고민을 했던 이유는, 기획자의 시간은 결국 '고민하는 시간'에 대부분 사용되기 때문이다. 기획자의 고민이 끝나지 않으면, 구체적인 액션 플렌이 나오지 않고 다음 활동으로 이어질 수 없다. 기획자가 병목현상의 주범이 된다.
그렇다고 기획자의 고민을 단순작업처럼 빨리빨리 쳐낼 수도 없다. 고민의 결과가 잘못되면 팀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설득되지 않고, 애초에 풀 필요가 없는 문제를 풀게 된다.
분명 기획자의 생각은 뾰족하고 가설은 명확해야 한다. 두리뭉실하고 복합 다단한 배경과 현상에서, 풀고자 하는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define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보통 고민의 깊이depth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그런데, 모든 고민이 이른바 "수영장 바닥에 내려가 동전을 주워올 만큼" 깊어야 하는 걸까?
이 지점이 주니어 기획자로써 가진 고민이었다.
그러던 어제저녁 퇴근길, 대표님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탔는데 이런 고민에 딱 맞는 조언을 주셨다.
"그로스에 홈런은 없다. 가설이 명확해지면 휘두르는 거다. 전략이라면 오래 고민하고 신중하게 검토하겠지만 그로스growth는 그게 아니다. 휘두르고 실패하고 또 휘두르며 조정해나가면 된다."
전략과 전술, 혹은 전략과 그로스growth에서의 생각의 깊이와 생각에 드는 시간은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퇴근하는 동안, 아래의 생각으로 이어졌다.
어차피 비즈니스, 그로스는 규칙이 정해진 게임이 아니다. 파울을 몇 번 당했다고 꼭 아웃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장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소 부정확해도 10번을 휘둘러서 3점을 내는 게, 신중하게 앞선 9개의 공을 거르고 마지막에 4점 홈런을 치는 것보다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홈런을 노리는 대신, 안타를 여러 번 누적해도 점수를 얻는 건 똑같다.
무엇보다 그로스growth는 저격이 아니다. 이는 어쩌면 지향사격에 가깝다. 사격장에서는 점수 구분을 위해 머리에는 10점, 몸통에는 8점, 팔과 다리에는 6점을 메기는지는 몰라도, 사실 이러나저러나 어디 한 군데 제대로 맞으면 얼마간 전투불능에 빠지는 건 똑같다. 머리를 맞추려고 신중하게 기다리다가 상대의 총에 맞아 죽느니, 일단 상대의 팔을 쏴두고 그다음에 휘청거리는 적의 머리를 노리는 게 낫다.
혹은 만약 너무나 정확하고 신중한 저격수가 갖가지 환경의 제약을 인내하고 기다리며, 끝끝내 적장을 저격하는 데 성공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사이 이미 적장은 아군의 기지를 초토화하는 데 성공했다면? 이건 성공인가 실패인가? 불필요한 성공, 과적합overfitting은 아닌가?
그러나 스스로도, 혹은 이 글을 읽을 신입 또는 주니어들이 이 뜻이 '생각을 얕게 해도 된다'거나 '생각이 두리뭉실해도 된다'라는 이야기로 오해하진 않았으면 한다. 기획자의 생각은 언제나 뾰족해야 한다. (실제 결과는 언제나 나중에 가서 봐야 아는 거지만 적어도) 논리적으로 맞아야 한다. 풀려고 하는 문제를 분명하게 정의define 할 수 있어야 한다.
즉슨, 홈런을 치려고 공을 거를 필요가 없다는 거지, 투수가 아니라 관객을 보고 휘두르란 이야기가 아니다. 저격을 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지, 목표를 향해 쏘지 말라는 게 아니다. 매번 수영장의 바닥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는 거지, 수영장이 아니라 온천에 뛰어들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논리적인 생각과 학습을 좋아하는 기획자로써, 그러나 여전히 주니어로써, 이 지점은 당분간 늘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지금 풀고 있는 문제가 전략인지 전술인지, 홈런을 쳐야 할 때인지 안타를 치면 되는 때인지, 내가 지금 적장의 머리를 노려야 하는 저격수인지, 시가전에서 적군을 맞닥뜨린 보병인지를 상상해보면, 감을 잡아갈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