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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모델보단 레퍼런스

누굴 동경하지도 이런 나를 미워하지도 않으며 커리어 쌓기

by 플래터

스타트업에 돈이 돌던 2020년, 그러니까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없던 청년이 아직 그럴싸한 포부와 태도 하나만으로 일을 구할 수 있던 때에, 시장에는 돈만큼이나 넘쳐나던 것이 있었다. 바로 ‘롤모델’과 ‘랜선 사수’.

그들은 대개 적게는 수십 억 원에서 많게는 수백 억 원의 투자를 받은 어느 회사의 팀장이나 기획자, 혹은 ‘일잘러’였다. 남들보다 먼저,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간 이들. 어느 인터뷰나 아티클에 담긴 그들의 몇 마디는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선례도 사수도 없어 방황하던 작은 조직의 신입은 그들을 줄곧 동경하며 그 말들을 주워섬겼다. 그들처럼 되고 싶다고, 아니 되어야만 한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되었다. 모두가 그들처럼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음을. 혹여 언젠가 비슷한 자리에 선다 하더라도 같은 행로와 방식을 밟을 수는 없음을. 무엇보다 아무리 합당하고 훌륭한 말이라도 나에게는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영롱하게 빛나는 저기 누군가의 말과 글이 지리멸렬한 이곳의 분투 앞에서는 자주 힘을 잃는다는 사실을 수차례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롤모델의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경이 떠난 자리에는, 얼마간 차갑고 시린 냉소가 들어섰다. 커리어 패스니 뭐니 하는 것들은, 변변한 자원도 담론도 없는 이 사회가 궁여지책으로 내세운 자기 착취적 자기 계발 신화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이 냉소도 오래가진 못했다. 부정과 반박으로만 얻을 수 있는 진리값은 없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은, 구태여 곱씹지 않아도 몸과 마음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결국 남은 건 지나친 동경도, 날 선 냉소도 아닌 어딘가의 자리.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한 마음. 그리고 그 자리에 들어선 건 롤모델도 랜선 사수도 아닌 또 다른 존재 ― 레퍼런스였다.

롤모델 혹은 랜선 사수와 달리 레퍼런스는 길을 정해주지 않는다. 정답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의 경험과 흔적이 내 고민과 맞닿을 때, 필요한 만큼의 단서를 건네줄 뿐이다. 그래서 레퍼런스는 한결 가볍다. 지나친 동경처럼 나를 조급하게 하지 않고, 냉소처럼 모든 것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내가 가는 길의 맥락에 맞추어 필요한 만큼만 빌려올 수 있고, 때로는 과감히 내려놓을 수도 있다.

돌아보면, 롤모델과 랜선 사수는 나의 시선을 보다 먼 곳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지금 곁을 지키는 건 레퍼런스다. 정답이 아니라 옵션, 이상향이 아니라 참고점. 그렇게 나는 다른 누구의 길이 아닌,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내가 되어야 할 것은 제2의 누구가 아니라 바로 제1의 나 자신임을 되새기며.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남겨야 할 흔적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누군가의 과도한 동경의 대상도, 눈앞의 현실과 괴리된 이상향이 되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을. 대신 필요할 때 펼쳐볼 수 있는, 참고할 만한 한 장의 레퍼런스로 남아야 한다. 누군가의 길 위에서 잠시 펼쳐졌다가 다시 닫히더라도, 오래 곁에 남는 그런 레퍼런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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