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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Mar 27. 2021

갈림길에서의 선택

모 아니면 도


수술 후 예방항암을 진행하던 중에 남편의 정기 검진일이 다가와서 복부 CT를 찍었다.

검사결과를 듣는 자리에서 우리의 종양내과 주치의 선생님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최대한 편안하게 검사결과를 전달해주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혈액검사 수치랑은 다 좋은데 간에 새로운 종양이  두 개 더 생겼어요."

"그게 뭔가요? 간에 전이 암이 새로 생긴 건가요?"

"아직 확실히는 몰라요. 그렇다고 1cm도 안 되는 것들을 개복해서 이게  암인지 양성종양인지  확인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크니 좀 더 기다렸다가 종양이 커지면 그때 가서 확인하고 다음 치료를 진행할 거예요. 그때까지는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하던 대로 항암을 계속 진행하시면 돼요."     

췌장암 수술 후 몸속에 남아있는 미세 잔존암을 없애기 위해 예방 항암을 진행하던 남편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간에 반갑지 않은 낯선 손님이 두 개나 찾아온 것이었고 전산화 단층촬영(CT)상으로 종양이 두 개 있다는 것은 CT( 전산화 단층촬영)는  촬영의 특성상 수박을 반으로 쪼갰을 때 수박의 한쪽 단면만 촬영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기 때문에 수박의 안쪽을 들여다볼 수 없으니, 남편의 상태도 수박을 반으로 잘랐을 때와 마찬가지로 간을 반으로 잘랐을 때 단면에 종양이 두 개가 보였다는 것이기 때문에 간의 안쪽에는 몇 개나 더 종양이 자리 잡고 있을지는 의사도 잘  모르겠다고 했다.     

속 터진다. 속 시원하게 남편의 상태를 알고 싶다.

그렇다고 남편의 배를 뚜껑을 열고 들여다볼 수도 없고.

예전에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속담을  명언으로 알고 살았는데, 남편이 암 환자로 등극한 이후부터는 모르는 것이 치명적인 독임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주변에서 알고 지내던 암 환우들이나, 췌장암 환자들이 항암 중에 간에 전이 암이  생기는 경우를 많이 봐왔던 터라 두려움부터  앞섰다.

항암 중이었던 남편은 늘 간수치가 기준치보다 높았다.

높아진 간수치 때문인지  남편은 부쩍 냄새에 예민해했고,  몸은 매번 힘들다고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누워 지내는 시간이 서서 지내는 시간보다 월등하게 많았고, 두통으로 어지럽다고 했으며, 각종 항암 부작용에 시달리느라 운동은커녕 정상적인 일상생활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서  몇 달만 더 참으면 결국은 예방 항암도 졸업하는 날이 올 것이고, 항암만 끝나면  사람답게 살 날도 머지않았으니 지금 이 순간이 고통스러워도 미래를 위해서 이 정도는  견뎌야지 하며,  인내력의 끝장을 보이며 참아왔던 고통의 시간들에 대한 예의도 없이 간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새로운 손님인, 범상치 않은 종양의 출현으로  남편과 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이제부터 무얼 어떡해야 할까?

몇 달간의 항암의 여파로 몸의 면역력은 이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설상가상 간에는 낯선 손님이 찾아왔고, 지금까지의 남편의 몸 상태를 유추해보면 간에 찾아온 새로운 손님이 그리 착한 손님으로는 보이지는  않는다.     

의사의 말로는 간에 새로 들어온 종양이 암일 경우에는 지금보다 더 독한 항암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현재에도  표준 항암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남편의 몸 상태는 이미 처참하게 망가져서 좀처럼 회생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췌장암 수술이 끝난 후에 예방항암으로 젬시타빈이라는 주사제와 젤로다라는 먹는 항암제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주사제인 젬시타빈에 비해 경구복용약인 젤로다의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항암의 회차가 진행될수록 일단은 잘 먹지 못하니 기운이 없고, 그 상태로  항암제를 맞으니 식욕이 더 없어지고, 계속 못 먹으니 체력 저하로  어지러워서 누워있게 되고, 그렇게 누워만 있으니 또 먹을 기운도 없고  이런 식으로 계속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항암 중이던 남편의 몸 상태는 암 환자라면 가장 치명적인 악액질 상태를 향해 서서히 전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충분히 맥을 못 추고 있는 환자의 몸에 지금보다 더 독한 항암제를 들이붓는다면 남편이 방바닥을 짚고 일어날 수 없을 것은 불 보듯이 뻔한 일이었다.     

막막했다.

그렇다고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도 없고, 우리가 이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남편이 암 진단을 받은 시점부터 끊임없이 우리는 혼돈의 시간과 결정 장애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암에 걸리고 나니  밥 한 끼를 무엇으로 때울 것인가 하는 가볍고 행복한 결정이 아닌, 여러 갈림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해야 쓰리 고는 못하더라도 피박은  면해서 최소한 목숨이라도  부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선택의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기 때문에 암 환자인 남편도 환자의 보호자인 나도 우리에게 처해진 현재의 삶이 비참하고 버겁기만 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살 수 있을지 과부 땡 빚을 내서 쪽집게 과외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한 번 암 환자가 되고 나니 모든 결정은 오롯이 환자나 그 가족이 해야 하고 그 책임도 당연히 본인의 몫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암이라면 가벼운 감기와는 다르게 목숨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선뜻 조언을 해주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그 누가 어떤 조언을 해준다 한들 책임은 오롯이 암 환자와 그 가족의 몫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어렵게 남편과 내가 걸어야 할 길을  선택했다.

우리 부부가  남편의 목숨을 담보로 선택한 길은 남편이 현재 경구복용하고 있던 각종 부작용이 심했던 젤로다라는 항암제를 중단하고 산에 가서 걷기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구복용약에 비해서 부작용이 덜했던 주사제인 젬시타빈 만은 계속 진행하기로 했다.

남편이 경구복용하던 항암제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던 이유는 젤로다의 부작용 중에 손바닥과 발바닥이 얇아지는 증상 때문에  남편이 걷기 운동을 하려해도  발바닥의 통증으로 오래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항암제가 암의 진행을 막아줄 지는 몰라도 암 환자에게 꼭 필요한 운동을 하지 못하게 하는 나쁜 역할도 한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학적인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의사와의 상의도 없이 먹는 항암제를 임의대로 중단하고 운동을 선택했던 이 길은 어쩌면 무모한 도박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항암제보다 더 독한 항암제를 써서 결국은 간이나 신장이 망가지는 순서를 차례대로 겪으며 호스피스를 갈 바에야 차라리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해서 모험을 하는 쪽이 조금이라도 살 수 있는 승산이  있어 보였다.     

항암제는 암을  줄여주는 효과가 있다고는 했지만 우리가 처방받아 시행했던 세포독성 항암제는  암세포와 정상세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에 암세포는 물론 정상세포까지도 왕창 파괴하기 때문에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기본적인  일상생활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항암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몸의 상태는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는커녕 회복과는 점 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또한 병원에 기대면 기댈수록 점점 드라마에서나  보게 되는 암 환자의 야윈 모습으로 변해가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보호자로서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가 암에 걸리기 이전이나 암에 걸린 이후에나 의학적인 지식은 별로 없었으나 치료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항암치료를 하면 할수록 남편의 상태는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평범한 일상생활조차도 할 수도 없는 몸으로 쇠약해져만 갔다.

나는 남편이 암에 걸린 이후부터 무작정 닥치는 대로 암에 관련된 책을 읽어나가면서 암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여러 책이 조언해주는 방향대로 결론을 조합해보니, 먹고 있던  항암제를 끊고 운동을 해야  남편이 제대로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긴다는 판단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새로운 종양이 보이고 항암 부작용으로 잘 걷지도 먹지도 못해서  침대와 한 몸이 된 남편에게 거두절미하고 산에 가서 걷기 운동을 할 것을 권유했다.

"지금 당장 산으로 가야 살 수 있어. 이 상태로 계속 항암만 하다가는  어차피 호스피스에 침대 하나 예약해둔 상태가 될 거야."

그러나 잘 걷지 못하고 먹지 못하는 남편에게는 이 말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렸나보다.

"산에 가기에는 날씨가 너무 추워. 그리고 발바닥이 아파서 지금은 걸을 수도 없어."

남편은 자신이 없어서인지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1월의 맹추위가 잔뜩 심술을  부릴 때 무작정 산으로 가라고, 항암 부작용으로  잘 걷지도 못하는 남편의 등을 떠미는 마누라의 등쌀에 남편의 큰 눈에는 끝내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달리 어떤 방법도 없었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는 막연한 항암은  죽음의 길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가야 해. 죽더라도 산에 가서 죽는 것이 산 좋아하는 당신한테도 훨씬 좋을 거야."     

결국에는,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의학적인 지식이라고는 병원과 한의원을 구분하는 정도의 무식의 끝판왕인 마누라의 단호한  태도에 이판사판 공사판까지  모조리 포기한 남편은  모든 것을 체념한 체 힘없이 산으로 향했다.

이 때에 남편은 아마도 이왕 죽을 목숨이니 마누라의 소원이라도 들어주다가 죽는 편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

결국 남편은 눈물을 글썽이며 산으로 향했다.

그러나 한겨울 혹한에 추위에 잔뜩 주눅 들어서 초라한 몰골로 산으로 향하는 남편의 힘든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고 멈출 수는 없었다.

더 늦기 전에, 남편이 자기 발로 걸을 힘이라도 있을 때. 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고 무엇이든지 시도해봐야 했다.     

그렇게 해서  남편은 한겨울 혹한의 눈 속에서  산속을 헤집고 돌아다니게 되었고 그렇게 한 달쯤 시간이 흘렀을 때에도 여전히 힘들다는 푸념을 밥 먹듯이 내뱉었다.

"첫날 산에 갈 때랑 똑같아. 종아리에 마비도 오고 장딴지가 말을 안 들어서 걷기가 힘들어. 지금쯤이면 좀 나아지기도 할 텐데 여전히 못 걷겠어. 늘 119 부를 준비를 하고 다녀."

"응, 그렇구나."

그러나 남편의 이런 푸념과는 다르게  남편의 산행하는 시간은 조금 씩 조금 씩 늘어나고  있었고, 처음 십분, 이십 분으로 시작됐던 산행은 삼십 분, 사십 분, 한 시간으로 늘어났으며 두 달 후에는 세 시간이 넘는 시간을 산속에서 씩씩하게 걸어 다니고 있었고,  그와 함께 멈추었던 식욕도 되살아나서 음식에 대한 예의를 갖추었고, 밥상 위의 반찬과 밥을 모조리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내가 의학적인 지식은 없었지만 산에 가기 시작하면서 되살아난 남편의 입맛이나 밥상 앞에서의 일상적인 수다는 남편의 몸이 조금씩 회복되어지고 있다는 징조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밥상 위의 반찬과 밥이 없어서 못 먹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  즈음이었다.

병원의 정기검진에서는 남편의 간에 있었던 종양들이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며 수술 후의 예방항암을 진행했던 종양내과와는 행복한 이별을 할 수가 있었다.     

누가 이별을 가슴 아프다 했던가? 살다보면 이렇게 후련한 헤어짐도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남편의 주치의였던  종양내과 선생님은 남편에게 다시는 서로가 종양내과에서 만날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감동적인 축하인사를 건네주었다.     

이 일을 겪고 나니 암에 걸린 이후에 남편과 나는 처음으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암에 걸렸다고 해서 웃을 일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 더 얻은 교훈이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과 암 치료의 길은 여러 갈래의 길이 있고 그 중에서 내게 맞는 길을 선택해서 실천하며 치료방법을 스스로 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교과서처럼 정해져 있는 병원의 항암 치료방법을 순순히 따랐더라면 모르긴 해도 우리는 종양내과와의  행복한 이별은커녕, 고래 힘줄처럼 질기고 질긴 인연의 끈을 생의 마지막까지 정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 아니면 도'

생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이 모가 되고 어떤 선택이 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

그러나 쪽박인 도가 되던지  대박인 모가 되던지 선택은 본인만이 할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라도 모가 되도록 노력하는 자세는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바람직한 자세인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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