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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뿔난 토끼 Mar 23. 2021

삶이 바닥을 칠 때

그 이후에는 올라가는 일만 남았다.



인생길을 살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예기치 않은 소나기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남편과 나도 그러했다.     

결혼생활 내내 아프셨던 시부모님과 같이 살다 보니 남들처럼 제대로 즐기는 1박 2일의 휴가 한번 가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집돌이 집순이의 삶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삶에 아무 불만 없었고, 늘 소나기에 대비한다고 열심히 일했고 미래를 위해 아끼고 절제하며 살아왔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췌장암이라는 진단을 받는, 제법 통이 크게 퍼붓는 소나기를 만나게 되니 아프기 전에,  하늘이 멀쩡할 때,  왜 우리는 우산도 미리 안 챙겼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이와 비례해서 살아온 햇수를 더해갈수록 인생의 연륜이 느껴지는 고품격의 삶은 아니더라도 그저 그런 평범한 삶을 소박하게 즐기고 살아갈 줄 알았는데 갑자기 퍼붓는 소나기는 남편과 나의 지극히  평범해서 오히려 그것이 행복인 줄도 몰랐을 평온한 일상생활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췌장암 수술 후에 예방 항암을 하는 남편의 몰골은  날이 갈수록 우리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손톱과 발톱도 시커멓게 줄이 생겼고 얼굴빛도 '나 암 환자'라고 명찰을 단 것처럼 흙빛으로 변해갔고, 허벅지에 붙어있던 얼마 안 남은 근육마저도 쏜살같이 줄행랑을 쳐버려서 남편의 몸은 항암치료 몇 회 만에 앙상한 고목나무처럼 변해버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변한 모습은 아프기 전에는 잘 먹었던 사람이 못 먹는 것이었고,  평소에는 돌도 씹어 먹을 것 같았던 식성 좋았던 남편이었지만 항암 하는 시간이 더해질수록 성격도 예민해지고 신경도 날카로워져 갔다.

"음식이 왜 이래? 일부러 나 못 먹게 하려고 이렇게 만드는 거야?"

항암 중이던 어느 날 식탁에서 밥을 마주한 남편의 눈에 끝내 눈물이 비쳤다.

"밥도 반찬도 국도 모두 같은 맛이야. 모래를 씹는 것 같아. 그리고 쇳가루 냄새도 나서 못 먹겠어."

"..........."     

남편의 이런 솔직한 투정에  내 눈에도 슬며시 눈물이 고인다. 

그동안 아픈 남편을 먹이기 위해 퇴근 후에는 주방에서 서 있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뭐든 몸에 좋다는 걸 먹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지지고 볶고 끓이고 하느라 다리에 쥐가 날만큼 서서 음식을 만들어댔고,  암 환자의 몸에 쌓여있는 나쁜 독소를 제거해준다고 해서 녹즙까지 만드느라 도무지 숨 쉬는 시간 빼고는 제대로 쉴 틈도 없었던 내가 듣기에는 참으로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정성을 들인 것들을 하나같이 못 먹겠단다.

음식 앞에서 투정을 부리던 남편을 밥 한 숟가락이라도 먹이고 싶어서 나는 남편을 달래었다.

"그럼 다시 만들어 줄까?"

"아냐, 됐어. 아까 자기가 음식 만들 때 그 냄새만으로도 구토가 났어. 난 못 먹을 것 같으니 그냥 이거 갖다 버려."     

이런 식의 밥상머리 대화를 아픈 남편과 주고받으며 평소에는 제법 강했다고 생각했던 내 의지는 끊임없이 바닥으로 추락에 추락을 거듭해서 지하 3층 정도는 내려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가 그랬는데. 

바닥을 치면 그때부터는 올라가는 길만 남았다고 했는데.

나는 대체 여기서 얼마나 더 내려가야 올라가는 길이 보이는 걸까? 설마 영영 위로 올라가는 길을 못 찾으면 어떡하지?

불안했다.

마음도 조급했다.

남편의 엉성한 허벅지와 구부정한 어깨를 지켜보는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든 것은 우리에게 앞으로 어떤 미래가 남아있는지 도무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다.

이대로 남편이 회복하지 못하고 무너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수시로 엄습했다.

그런데 그때, 남편이 아까 버리라고 했던 그 음식들을 다시 마주하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애쓰며 밥도 반찬도 입에 넣고 먹으려는 시도를 했다.     

항암 중에 남편은 입덧하는 임산부처럼 그렇게도 음식을 먹기 힘들어했었다.

밥을 억지로  입에 밀어 넣는 남편의 얼굴에는 힘들어서인지 땀이 비 오듯이 흐른다. 짧게 자른 머릿속까지 땀방울이 맺혀있다.

살기 위해서 반드시  먹어야 했던  남편은 항암 중에는  전쟁을 치르듯이  매번 음식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그렇게 남편은 암과의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먹는 것조차도 열심히 노력을 했다.     

그런데  억지로라도 음식을 목에 넘기는 남편을 바라보니 이제껏 지하 3층에서 갇혀있던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의 출입문을 찾은 기분이고,  어둡고 침침하기만 했던 내 삶에 한줄기 서광까지 비친 느낌이 들었다.     

이건 도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건지 살기 위해서 먹는 건지 구분도 안 갔지만 남편은 그렇게 내가 만든 음식들을 억지로라도 우적우적 열심히 먹어줬고, 나는 그렇게 먹기 시작한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회복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단서를 발견한 기분에 들떴다.

그래 한걸음만 더.

지금은 지하 3층에서 더듬거리지만, 

한걸음 한 걸음씩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지상으로 올라가는 날도  있겠지.

서두르지 말자.

천천히 시작하자.

올라가다가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하니까 조심조심 천천히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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