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처럼, 바람처럼, 시간처럼.

비움.

by 윤슬



며칠 전부터 날도 우중충하고 비바람이 불어 일교차가 크다했더니 결국 우리 둘째 아이가 감기에 걸렸습니다. 삼일째 함께 데리고 있어, 저는 평소보다 좀 더 바쁘고 피곤하긴 하지만, 힘들기보다 오히려 행복합니다.


첫째는 나름 세 살까지 혼자만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는 기간이 있었기에 비교적 많이 안아주고, 많이 챙긴 것 같은데,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둘이 된 탓에 첫째만큼 단둘의 시간을 보낸 적이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아픈 건 별로 탐탁지 않지만 이렇게라도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아이가 아주 가벼운 감기 상태라서 가능한 생각이겠지요. 하핫.


아침부터 핫케익이 먹고 싶다는 아이의 손을 잡고 급히 장을 봐왔습니다. 그리곤 부리나케 아침밥을 해서 먹이고, 간식과 약까지 다 먹이고 보니 딸아이는 금세 옆에 누워 잠이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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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낮잠 시간을 틈타 커피 한잔의 여유를 꾀하며 최근 읽고 있었던 책의 페이지를 슬며시 들춥니다.


어젯밤엔 이 책을 읽다가 너무 좋았다 싶었던 구절에서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같은 자리에 다시 멈춰 여러 번 반복해 문장들을 가슴으로 느껴봅니다.


저는 가끔 책을 읽다가 좋은 부분을 발견하면 세 번 정도 반복해서 읽는 습관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건 더 깊이, 더 오래도록 내 안에 새겨두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겁니다.



비워 내는 연습
많이 담는다고 해서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담고 채운다고 해도 넓은 마음이 한없이 풍족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비워 내는 것이 담아 두는 것보다 편할 때가 있습니다.
봄의 파릇함을 담아 두고 싶다고 해서 여름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가을의 낭만을 한없이 즐기고 싶다 해서 가슴 시린 겨울이 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오는 대로 담아 두지 말고 흘려보내면 됩니다.
사랑 만을 담아 두고 싶다고 해서 이별의 슬픔을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행복한 추억만 담아 두고 싶다고 해서 눈물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물 흘러가는 대로,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담아 두지 말고 고이 보내 주십시오.
나에게 고맙다 中 / 정승환





최근 오래된,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는 선택들과 마주하면서 더욱 비워내고, 내려놓고, 보내주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쉽지 않은 일이네요. 그래서 더욱 와닿는 글인가 봅니다.


어차피 다 담지 못해 흘러넘쳤던 사실들과,

시린 겨울, 그리고 눈물의 기억들은 피할 수 없음을,

이제야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그저 오는 대로,

그저 흘러가는 대로,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그렇게

물처럼, 바람처럼, 시간처럼

담아두지 않고 고이 보내주려 합니다.



그것이 행복이든, 어떤 불행이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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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없는 그대가, 그렇다고 말도 없는 게 아니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신중함으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쌔근쌔근 내 옆에 고이 잠든 천사의 얼굴을 보며,

더 비워 내고, 흘려주겠다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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