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도 잘 견뎌야 '어른'이라고?

by 윤슬
야근


거의 매일 야근을 하다 오랜만에 조금 일찍 퇴근해 집에 오는 길이라는 신랑. 물론 오늘도 정시 퇴근은 꿈도 꾸지 못했고, 이미 퇴근 시간은 한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그럼에도 이것이 빠른 퇴근이라 만족해야 하다니.


한 손엔 캔맥주가 든 검은 봉지와 다른 한 손엔 서류가방을 들고 흐리멍덩한 동태 눈알을 장착한 채, 얼마 남지 않은 기운마저 바닥에 질질 묻혀가며 걸어 들어오는 그다.





밥 맛



신랑은 키가 크고 마른 편이긴 하나 먹성 하나는 좋다. 그래서 나는 신랑의 밥 먹는 모습만 봐도 오늘 그의 기분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평일 저녁, 늘 '차량이 도착했습니다.'라는 인터폰의 알림 소리에 맞춰, 준비한 음식들을 덮이고 덜어 식탁 위에 차려 낸다. 그럼 신랑이 주차를 하고 올라와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는 시간까지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똑 떨어지기 때문이다. 늘 식사시간이 늦어 배고플 신랑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음식을 주려다 보니 어느새 패턴이 된 것이다.


매번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늦는 신랑 덕분에 나는 혼자 저녁을 해결하곤 신랑을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됐다. 저녁은 이미 해결했음에도, 신랑이 저녁을 먹을 때만큼은 커피를 한 잔 타서라도 신랑 앞에 마주 앉는 나다. 그 시간, 비록 우린 다른 종류의 음식을 먹더라도 하루 일과의 여러 주제를 가지고 같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요즘 신랑이 밥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확실히 회사일과 삶이 더 고단해졌음이 느껴진다. 기분이 좋거나 평범한 땐, 차려진 음식을 보면 자동적으로 눈을 빤짝이며 도전적인 자세로 손과 입이 부산스러워진다. 그리고 배가 많이 고팠던 날이면 야무지게 씹어 대는 입가에선 '허겁지겁 허겁지겁'하는 소리가 연신 귀엽게 삐져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오늘처럼 몸이 음식 쪽으로 기울지 않고 의자에 기대진 자세로, 음식을 젓가락으로 건성건성 건드릴 때를 보면 입맛이 똑 떨어진 게 내 눈에 읽히지 않을 수가 없다..



"자기야 음식 대하는 태도가 왜 이리 건성건성이지, 배도 고플 건데 입맛이 없어? 무슨 일 있어?"



이리 물어보면 그날은 틀림없이 회사에서 또는 다른 어떤 곳에서 신경 쓰이는 일이 생겼다며 얘길 털어놓곤 한다. 식사라는 게, 입맛이라는 게 그렇게 거짓말을 못한다.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거나 몸이 아픈 날이면 입맛 먼저 멀리 달아나버리니 함께하는 배우자는 금방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갑질



신랑은 사장님께서 매우 기분이 언짢으실 거라며 주차장에서 확인한 문자 내용을 알려준다. 신랑에 말에 의하면 내용은 대충 이랬다.



"좀 있다 내가 전화하면 잘 받아요. 꼭 얘기할 게 있으니." (사장님 왈)



업무 중 사장님께 부탁(?) 받은 말이며, 전화는 몇 시, 어느 때에 주실지 알려주지 않으셨고 퇴근시간까지도 전화가 없으셨단다. 그러니 신랑은 퇴근길 나와 전활 끊고 바로 이어 회사 동료의 전화를 받고 통화를 했다고 한다. 동료와의 전활 끊고 폰을 확인했더니, 사장님의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와있었던 것. 신랑이 확인차 여러 번 다시 전화했더니 전화를 받지 않으시더라는 것이다.



"제가 분명히 전화 좀 잘 받으라고 얘기드렸을 텐데요.!" (사장님 문자)



나는 기가 막혔다. 업무 시간도 아니고 퇴근을 했어도 벌써 했을, 그것도 다 저녁시간에 전화해서 전화를 안 받았다고 저런 식의 문자를 보내다니. 그야 평소에도 평일 출. 퇴근 시간이고, 주말이고, 심지어 새벽 5시에도 시간, 장소 불문하고 당신이 내키는 때 전화해서 업무 얘길 하는 분이다. 그럼 신랑은 밥 먹다 말고, 자다 말고, 무엇이든 하다 말고 통화를 하기 위해 하던 일을 중단하기 일쑤였다. 그 외에도 욱하는 성격의 소유자라 장소 불문하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내신다던지, 자신의 말이 맞다며 무조건 우긴다던지 하는 상식 밖의 언행을 일삼는다.


그런 얘길 전해 들을 때면 난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난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들어주고 다독여주고 화는 삭이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이 직원을 고용했다고 한들 한 사람의 시간을 모조리 자신의 것인 양 저당 잡고 있는 듯 착각해선 안될 일이다. 또 아무리 자신이 돈을 주고 당당히 노동을 샀다 한 들, 그 사람의 시간과 인격, 자유는 당신이 산 정당한 노동에 포함되지 않은 개개인의 것이다.


이런 일을 겪을 때면, 가끔 진정한 어른이 무엇일까에 대한 생각을 해본다. 회상해보면 어릴 시절부터 잘 참아야 어른이란 말을 익숙하게 들은 것 같다. 불이익이나 억울함도 조금은 참을 줄 아는 게 어른이며, 불의를 보고도 내 일이 아니면 모르는 척 융통성 있게 지나칠 줄 아는 게 어른의 삶이라는 것. 사실 난 그런 게 어른이라면 어른 따위 되기 싫었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내 권리를 정당히 요구하며 지낸 20대의 사회생활을 회상하면 끝 맛이 비릿한 생선 향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다. 어딜 가든 일은 똑 부러지게 잘했던 나지만 직장생활이란 게 일만 잘한다고 되는 건 절대 아니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루저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별난 사람, 참을성 없는 사람, 융통성 없는 사람,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건, 그저 시간문제였다.





어른



여전히 그런 용기가 내게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사람들의 노동과 개인의 삶을 부당하게 착취하며, 갑질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충동이 인다. 그 인간의 귀를 잡아당겨 귓구녕에 대고 큰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부당하다고!! 부당하다고!!

당신이 산 건, 딱 정해진 시간 안의 정당한 노동이야.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우린 도대체 언제쯤 돼야 버릴 수 있을까.

이런 부당한 대우와 구역질 나는 갑질까지 견뎌내야 사회생활을 잘하는 어른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우린 언제까지 내 것을 부당하게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갑질'도 잘 견뎌야 '어른'이라고?

진정한 어른이란 도대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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