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종이를 자르기 위해 급한 대로 바로 보이는 주방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당췌 뭔 일이 당가. 그 큰 주방가위가 고작 얇은 종이 한 장 자르려는 내 손가락 힘에 소리 없이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잉? 스러운 너무 황당한 상황에 사태를 파악하려 주방가위의 부서진 손잡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봤다.. 엉덩이 탐정이 되어 매서운 직감과 추리력으로 살펴본 결과 이미 오래전부터 조금씩 실금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가위는 결혼을 할 때 샀던 것이라 이미 8년 가까이 써왔기에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아니 그렇다 할지라도 너무나 허망하게 힘없이 부서진, 끝만 겨우 붙어있는 가위 손잡이 부분을 보니 참말로 황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때였다.
"으읔.. 으읔.. 그거 알아? 이 집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
"아앜, 깜짝이야. 가위, 네가 지금 말한 거니?"
"그으래... 나 마지막 유언이 있어서.. 말 못 하는 척해야 하는 게 이 세계 룰이지만... 곧 죽을 건데, 지금 룰 따위가 뭣이 중헌디. 산 가위 소원도 들어주는데, 내 유언 좀 들어줘."
"아니.. 미안한데 유언은 좀 있다 듣고, 우리 집에 이상한 소문 그게 뭐시여?"
"아.. 그게 말이야. 이 집 가전 가구들, 그러니까 물건들 사이에 오래된 소문이 있는데... 이 집에 들어오면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내 유언도 그 소문이랑 연관이 있어."
"헐~~ 그런데... 그 소문이 왜 났는지 알 것 같네.. 인정. 나도 최근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노란 가위 네 유언은 뭐야? 룰을 깨고 용기 내어 얘기해줬으니 나도 꼭 들어줄게!"
"고맙다 주인. 흐규흐규. 그러니까.. 내 유언은......"
집안 오래된 물건들이 신음하고 있다
결혼 전 신랑은 자신의 물건을 엄청 아끼고 소중히 하는 사람이었다. 한 번 살 때 오랜 고민을 하고 신중히 구매한 뒤, 아끼고 아껴서 오래도록 쓰는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하지 않은, 단순한 지인 사이일 때도 그런 부분이 눈에 확 띄었으니 말해 뭘 해?
솔직히 그런 부분을 보고 결혼을 결심한 부분이 컸다. 작고 사소한 물건부터 크고 귀중한 물건까지 어느 것 하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없으니... 물건도 저리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면 하물며 사람인 나는 얼매나 아끼고 아껴줄라는가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역시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연애기간 2년 반, 결혼기간 7년 근 10년 가까이 신랑은 날 무지 아껴줬다. 응 그러니까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인다는, 그 대단한 눈빛과 웅장한 마음으로 말이다. 얼마나 나의 선택이 탁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래고래 그래도 내가 적정 수준 착하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못 됐어도 못 느낄 뻔했잖아.. 그래도 뭐 어때? 내 눈에 보이면 장땡이니까. 푸핫.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신랑에게 반했던 그 부분이 요로코롬 답답한 부분이 될지 몰랐던 것. 이래서 살아봐야 안다고... 어후, 그래 옛 어른들 말씀은 하나 틀린 게 없더라. 암튼 신랑의 그런 습관? 신조(덕분?)때문에, 우리 집에 들어온 물건들은 절대 쉽게 나가는 법이 없었다.
둘 다 깔끔한 성격에 물욕도 없는 편이라 둘이 살 땐 늘 방금 이사한 집처럼, 아주 집이 휑하니 말소리도 어? 쩌렁쩌렁 울리고 말이야 참 좋았는데, 아이가 태어나자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여야 할 물건들이 많아졌다. 나는 성격상 쓰다가도 더 이상 사용할 일이 없으면 필요한 누굴 줘서라도 바로바로 집에서 내 보내고 공간 정비를 하는 스타일인데, 신랑은 안 쓰더라도 일단 둬야 하고, 혹시라도 쓸 0.1프로의 가능성 때문에 누굴 주지도 못하는 스타일이었던 것.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좁은 집 여기저기 짱박히기 시작하는 물건들이 많아지자 나로선 매우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런 우리 집도 드디어 물건들이 집 밖을 나갈 수 있었으니.. 음.. 그것도 다 똑똑은? 내 덕이니라.(사실 무식한 건 안 비밀)
어느 날, 작아진 아이들 옷을 동네 채소 마켓에 올려 팔게 되었는데, 이것이 엄청 잘 팔리는 것이었다. 중고로 팔고 돈을 받는 걸 보던 신랑이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내게 팔아 보란 것이었다. 나는 이때다 싶어 신랑 마음에 변화가 오기 전에 얼렁 예쁘게 디피하고 사진을 찍어서 마구마구 채소 마켓에 판매글을 올렸고, 그 계기로 필요 없는 건 집을 나갈 수 있겠되었다. 그렇게 필요 없는 물건은 제 주인을 찾고 집은 조금씩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 사건? 은 앞으로 집에서 물건이 나갈 수 있는 길을 개척한 대단한 혁명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팔기도 애매한 물건들이었다. 그중 가위, 체온계, 폰 등이 거기에 속한 것들이었다.
그래, 집에 있는 것이라면 웬만해서 내손을 거치면 다 고칠 수 있다는 걸 들킨 게 화근이었다. 사실 나도 내가 이런 재능이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결혼 후였다. 서랍장이 고장 나면 몇 번 여닫아 보고 원인을 파악하고 나면 나사를 빼서 조금 높은 위치에 다시 달아주면 서랍장이 새 생명을 얻었고, 아이들 장난감이 고장 나도 해체해서 원리만 파악하면 금세 다 고칠 수 있었다. 심지어 체온계 버튼이 고장 난 것도 꾀를 부려 부서진 부분에 다른 고무를 붙여 고친 후 몇 년을 더 썼고, 작은 방 한 부분만 겨울마다 곰팡이가 쓰는데 그 라인만 잘라 인터넷으로 구매한 풀과 벽지로 매년 도배도 직접 새로 했다.
최근엔 아랫집 화장실 천장에 물이 샌다고 해서 200만 원짜리 공사를 해야 한다고 했지만 욕조 실리콘이 뜬 게 원인이 아닐까 하여 인터넷에서 구매한 실리콘으로 직접 구멍을 예쁘게 막아 큰 공사도 피할 수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내가 아이들 머리를 집에서 잘라주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신랑이 자기 머리까지 내게 맡기며.. 이것이 바로 창조경제라며 기뻐할 지경이니.. 신랑의 깐깐한 신조와 나의 재능이 합쳐져 피할 수 없는 환장의 콜라보가 완성되어 그 이상한 소문의 근원지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우리 집 물건들은 이제 대부분 8년 정도 되었다 보니 최근엔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참사가 발생하고 있다. 신랑의 휴대폰은 2년 썼을 때 액정에 전체 금이 갔는데 그걸 3년을 더 썼고, 액정은 겨우 전화와 톡이 될 정도로 화질도 좋지 않았다. 진즉 보내줬어야 할 그 폰을 계속 쓰다 결국 폰이 꺼져서 켜지지 않아 서비스센터에 방문해 사망 판정을 받고야 보내주기로 결심한 것.
"거봐... 휴대폰이 나 이제 좀 보내줘. 편히 쉬고 싶어. 진짜 이렇게 해도 안 보내주네 싶으니 마지막 방법을 택한 거잖아... 폰이 자살을 시도하다니. 어휴 불쌍해."
실제로 최근 가위가 힘없이 부서지고, 청소기가 복구 불능으로 사망했고.. 냉장고 문도 자석 부분이 고장 나서 수동으로 접어서 닫고 있으며 세탁기에선 끼익 끼익 하는 신음소리가 난다. 이젠 곳곳에서 '나도 보내줘'라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아.. 그러니 당연히 그런 소문이 날 수밖에.. 인정 인정.
아 맞아, 어제저녁 그 주방 가위의 마지막 유언은 약속대로 내가 꼭 지켜줬다. 그래서 오늘 아침 쓰레기 분리수거 함으로 드디어 묻혀 깊은 잠에 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마지막 유언은... 제발 날 그냥 편히 보내줘. 추하게 생명을 연장해서 사는 건 의미가 없어. 가위답게 살다 가고 싶어.그러니 붕대 따위 칭칭 감아서 몇 년을 더 쓸 생각일랑 하덜 마러. 제에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