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일기는 왜 끝이 났나.

오밤중의 습격.

by 윤슬
일기장.


오늘도 이렇게 하루가 끝나 간다. 아이들을 재우고 어질러진 집안도 대충 정리하고 나면 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어있다. 이 시간 나는 조용히 식탁에 앉아 글을 읽거나 쓰고, 보고 싶은 영상을 보기도 한다. 그렇게 혼자만의 커피 향 같은 시간이 끝나갈 때쯤 오매불망 나를 기다리던 펜을 들어 일기를 쓴다.


그렇게 일기를 쓰다가 오늘은 문득,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엄마의 일기장이 떠올랐다. 살다 보면 가끔은 거부할수록 더욱 나를 쫓아오는 그런 것들이 있다. 어린 시절 기억 속 엄마의 일기장이 그렇다.


여느 때와 같이 하루를 짧게 기록하고 편안한 잠을 맞이 하려던 찰나 엉뚱한 물음이 나를 습격해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했다.


엄마는 왜 매일 쓰던 일기를 멈췄는가.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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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삼 학년 때 우연찮게 엄마의 일기를 읽게 되었다. 차라리 글자를 익히기 전에 마주쳤더라면 조금은 덜 아팠을까? 엄마의 일기는 유난히 아픈 언어가 많았다.


힘들다.. 아프다.. 죽고 싶다..


일기장 속, 초점 없이 비틀대는 엄마의 걸음을 작은 내 발로 쫓아본다. 무엇을 마주할지 모르고 천진난만하게 쫓아가던 아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미지의 세계를 마주하고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다. 나는 난생처음인 그것의 정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음에 그저 무섭고 아팠다. 차라리 글을 모르는 까막눈이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던 날.


그날 이후 나는 어떤 불안함에 휩싸여 엄마를 지켜야겠다는 책임감에 묶였다. 나는 보초라도 서듯 매일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어린 딸이 빠짐없이 모두 읽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그녀는 그렇게 하루하루의 고통과 푸념을 일기장 가득 토해놓고 있었다.


그 시절 내겐 엄마가 느끼고, 말하고, 표현하는 세상이 내가 가진 전부였다. 그런 의미에서 겨우 아홉 해 살아온 아이에게 세상은, 고작 엄마가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리라. 빼곡히 쓰인 검은 글자들 중 기쁨이라곤 한 자도 찾아볼 수 없는 일기장의 글들충격으로 다가오기 충분했고, 일기를 읽는 횟수가 늘 수록 나의 세상에도 아픔의 단어들이 늘어만 갔다. 이 어린아이에게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변화를 눈치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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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생각이 났다. 세 번의 자살시도 후 더 이상 엄마는 일기를 쓰지 않았었다. 목숨을 버리는 시도 또한 끝이 났지만 이상하게 매일 쓰던 일기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당시엔 단순하게 드디어 마음을 좋게 고쳐먹었구나라는 안도와 이젠 훔쳐보지 않아도 된다는 어떤 해방감에 꽉 조였던 숨통도 조금은 느슨해졌던 것 같다.


그땐 어려서 정확히 알지 못했다. 엄마의 일가가 멈춘 이유. 이젠 알 것도 같다. 더 이상 나쁜 마음을 먹지 않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살시도 실패로 인해 다시 떠안아야 할 과제와 죽지 못해 더욱 커진 죄책감에 그녀는 그나마 힘이 되어주던 '글' 마저 모두 내려놓은 것이었다.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녀는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비록 아픔의 단어들로 가득 차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삐져나오던 일기장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엄마의 글 솜씨 하나만은 좋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일기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적으로 많이 아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엄마가 매일 일기를 기록했던 그때는 서른 중반. 고작 내 나이쯤이었다. 나는 이제 막 '일기'를,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이 좋은 때 모든 걸 내려놓았구나. 이렇게 돌아보니 그때의 엄마가 내 또래 친구로 느껴져 서른 중반의 그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엄마가 다시 '일기'를, '글'을 쓰면 어떨까?


매일 밤 숙명처럼 느껴지는 고단한 하루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조용히 식탁에 앉아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 향의 시간을 음미하며 기쁜 일, 아픈 일, 그저 그런 일 모두 글에 묻혀 쏟아버리면 어떨까.

한껏 비워내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좋은 베개를 베고, 좋은 이불을 덮고, 몸과 마음을 주무르는 편안한 잠을 자고 일어나 상쾌한 공기와 새 태양을 본다면 어떨까..




엄마. 나는 엄마가 언제라도 다시 일기를 썼으면 좋겠어. 그리고 이젠 죽음으로 향하는 꿈이아닌 생명력 있는 싱그러운 꿈을 꾸길 바라.. 이 딸내미가 항상 응원할게.









이미지 출처(블로그. 린 생기 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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