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근상을 받지 못한 아이.
초등학교 때였다. 그날은 성적표가 나오던 날이었다. 선생님이 주시는 성적표를 받아 든 나는 뛸 듯이 기뻤다. '우'와 '수'로만 채워진 성적표와 성적우수상까지 받아 스스로 만족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마음은 이미 집에 있는 부모님의 앞까지 가 있었다.
"인마, 성적 우수상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근상이 중요한데 올해 개근을 못했네? 사람은 성실해야 되는 거야. 그래서 개근상을 받아오는 게 아주 잘하는 거야. 알겠지? 다음번엔 개근상 꼭 받아와"
나의 기대와 너무나 상반되는 아버지의 반응에 어린 나의 마음이 바닥에 뚝 하고 떨어졌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학생은 아파도 학교에 가서 아파야 한다며 열이 나고 아파서 기운이 빠져 파김치가 된 나를 기어코 학교에 보내 책상에 앉혀 놓곤 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그리고 성인이 되어서까지 아파도 꾸역꾸역 학교를 가고, 일터에 가야 했다. 나는 그게 성실함이며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런 극단적인 성실은 탈이 나기 마련이었다. 고3 초 고등학생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걸 포기하고 S전자에 입사를 했다. 일 년 반 동안 나는 요령이란 걸 모르고 성실히 근무했다. 일한 지 일 년이 넘은 시점, 3교대 9시간 또는 2교대 12시간의 근무 시간 동안 무리하게 목을 쓴 게 원인이 되어 목디스크라는 진단을 받았다. 몇 개월 병가라도 내고 쉰다는 건 내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생각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다 결국은 고개를 숙이고 일하는 건, 단 1분도 버티기 힘들어진 나는 방진복 안 마스크가 다 젖도록 한참을 소리 없이 울어야 했다. 참았던 눈물을 흘리던 그날 나는 퇴사를 결정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내 앞에선 개근상을 못 받았다고 타박을 하던 아버지였지만 뒤로는 친척들에게 공부를 잘하는 딸이라며 유난히 자랑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나이가 드시면서 지금은 충분히 유연해지셨고 애정 표현 또한 느셨지만, 그땐 그게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인 아버지만의 교육 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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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이 정의로웠던 아이.
아홉 살, 우리 학교에선 한참 왕따 놀이가 유행이었다. 얼굴이 하얗고 예쁜 대장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지명을 하는 아이는 왕따가 되었다. 혹여라도 그 왕따가 된 아이를 놀아 주는 아이가 있다면 다시 왕따는 놀아주는 아이로 바뀌는 거지 같은 놀이였다.
한 번은 같은 동네에서 나고자란 나의 절친이 왕따로 지명됐다. 나는 룰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내 부끄러운 생각들을 접고 대장에게 찾아가 내 생각을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니가 먼데 애들을 따돌리고 놀아주고 난린데? 내 친구 괴롭히지 마라."
나의 말을 들은 대장은 당황한 듯 아무 말을 못 했고 나의 어깨를 밀치며 대장 대신 따지고 들던 대장 오른팔과 다투게 되었다.
"자도 가만있는데 니가 먼데"
"니는 덩치 값이나 좀 해라. 싸워서 이겨도 이기겠다만 옆에 붙어서 뭐하는 짓인데. 부끄러운 줄 알아라."
선생님이 오시며 싸움은 끝이 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절친과 나는 스쿨버스 안에 나란히 앉았다.
"내가 이렇게 하면 자들이 내일부터 안 놀아 줄 걸 안다. 그렇지만 나는 니가 더 소중하다. 니가 어떤 선택을 하던 나는 아무 말 안 할게."
다음날 나의 절친은 나를 떠났고 그날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늘 은따가 아니라면 왕따로 지냈다.(시골에서는 학교가 많지 않았으므로 계속 같은 아이들과 만나게 된다.) 물론 그 아이들의 수준이 나와 맞지 않아서 내가 그들을 전따 시킨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다신 없을 순수함 가득한 진심으로 평생 잊지 못할 차가운 배신을 맛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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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은 사람을 살린, 죄가 많은 아이.
아홉 살, 나는 집에 있는 것도, 학교를 가는 것도 싫었다. 학교에선 이미 왕따를 당하고 있었고, 집은 매일같이 초상집 분위기였다. 첫째 언니가 가출을 하자 엄마. 아빠는 서로를 원망하며 매일 싸우셨다. 아빠는 술로 하루를 보내고, 엄마는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그쯤 나는 엄마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힘들다. 죽고 싶다는 내용과 큰언니를 향한 걱정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일기장이었다. 엄마가 걱정이 되었던 나는 매일 엄마의 일기장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훔쳐보아서 그런지 엄마를 보면 불안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하루는 불안한 마음이 극에 달해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주방에서 앉아 텅 빈 둥근 상을 앞에 두고 멍한 표정으로 한 손에는 약을, 한 손에는 물컵을 들고 있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엄마의 자살 시도를 막았고 그 후로도 두 번 더 자살시도를 했다.
이상했다. 꼭 자살 시도 전엔 신이라도 내린 듯 내가 엄마를 찾아서 말릴 수 있었다. 결국 세 번 째는 유서까지 보게 되었고 엄마는 병원에 실려가 위세척을 하고서야 겨우 살아났다. 한동안 엄마는 죽만 먹을 수 있었고, 목에선 쇳소리가 났기에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내가 죽고 싶은 엄마를 살린 사실에 대해 엄마가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이유만으로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 반대로 생각해서 어린 내가 다 보고 겪은 건 운이 나빴다고 해야 될까? 여전히 정신적으로 많이 아픈 엄마를 보고 있자면 그때 내 행동이 잘한 건지, 잘 못한 건지 쉽게 정의 내리지 못한다. 힘든 엄마를 볼 때면 떠오르는 이 물음이 죽고 싶은 사람을 살린 나의 죗값 이리라 생각한다.
나는 늘 열심히 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가도 조금도 채워지지 않던 엄마의 행복에 목말랐다. 내가 영원히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엄마의 행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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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런 아이.
내가 졸업한 중학교엔 오랫동안 이어오던 풍습이 하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된 선배가 직속 후배인 중3들의 수능 전, 모교를 방문하여 찰떡과 엿을 나누어 주며 격려해주는 일이었다.
어김없이 나도 모교를 방문했다. 준비해온 떡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중학교 시절 삼 년 내내 담임을 맡아주셨던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그래 미혜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그런데 동생은 과학상자 조립도 잘해서 대회에서 상도 많이 타고 성적도 좋은데 미혜는 좀 그랬지?"
삼 년 내 나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은 당시 두 살 아래의 남동생의 담임을 맡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또 찾아와 인사해 주어 고마운 마음에 농담 삼아 던진 말이겠지만 난 하나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날 모교를 방문했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선생님의 기억과는 달리 나는 중학교 내내 성정이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성적우수상도 꽤 받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팩트는 내 남동생 보다도 성적이 더 좋았었다. 어떻게 삼 년 내내 담임을 했던 분이 나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의 한마디에 나의 중학교 삼 년의 노력과 시간들 그리고 추억들은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증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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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피우는 아이.
"킁킁- 킁킁- 담배 냄새가 나는데? 너 담배 피우지?"
"아닌데요 선생님. 저 진짜 담배 안 피운다니까요."
"안 피우긴 뭘 안 피워. 냄새가 나는데. 저기 가서 손들고 서있어"
고 1 때, 무난하게 문을 열고 교실에 입실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매일 아침 담임선생님께 붙들려 한참이나 실랑이를 해야 했다. 내게서 매번 담배를 피웠다는 자백을 얻어내지 못했던 선생님은 1교시 시작종이 울리기 전까지 손을 들고 벌을 서개 하며 그분을 풀었다.
그 당시 학교에선 아침마다 가방과 옷을 들춰 소지품을 검사했다. 소지품 검사 시 담배나 라이터가 발견되거나 평소 담배를 피웠다는 첩보가 선생님의 귀에 들어간 이름들은 어김없이 금연침을 맞도록 했었다.
"아아- 방송 테스트, 방송 테스트. 지금 호명되는 학생들은 지금 바로 즉시 양호실로 와서 금연침을 맞도록 합니다. 김순이, 권태미, 김나영, 이미영....."
그날 아침도 금연침을 맞아야 할 대상들의 이름이 방송으로 호명되었다. 학생이란 신분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던 흡연자라는 타이틀은 아침부터 학교 안을 시끌벅적 소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호명된 이름 중엔 내 언니의 이름이 늘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래서 학교를 가는 아침이 너무 싫고 짜증스러웠다. 조금의 오차도 없이 어쩜 그리도 아침 풍경은 늘 한결같았을까.
입학 당시 장학금을 받고 입학 한 나는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전교생들 앞에서 당당히 단상에 올라 상장을 받았었다. 그 당시 둘째 언니 친구들은 저 아이가 정말 네 동생이 맞냐는 물음을 반복하며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와 둘째 언니는 늘 극과 극이었다. 유순하게 생기고 우유부단했던 언니는 늘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스타일을 고수하며 학교 생활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성적도 좋지 않았고 대학도 일수가 모자라 졸업하지 못했다. 반면 나는 놀아도 할 건 해놓고 놀아야 하는 성격이었고 쓸데없이 정의로운 고슴도치 같은 스타일이었다.
당시 집이 시골이라 차편이 많지 않았기에 시내에 있는 작은 원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언니는 내가 없는 시간에 친구들을 데려와 놀기 일쑤였고 종종 담배도 피웠던 것 같다. 자취방 안엔 담배꽁초가 가득한 음료수 페트병이 가끔씩 보였으니 말이다.
나는 아무리 교복을 빨아도 지울 수 없었다. 찌든 담배 냄새도. 담배 피우는 언니의 동생이란 낙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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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받는 게 어색한 어른 아이.
나는 개근상을 받지 못해 성실하지 못했고, 쓸데없이 정의롭다가 주로 벌칙을 받았고, 죽고 싶은 사람을 살려서 죗값을 치르고 있으며, 뭐든 잘했어도 늘 그저 그런 아이로 기억됐고, 때로는 피지 않은 담배까지도 어쩌면 결국 피웠어야 속이 시원했을 그 모든 사실들로 칭찬은 주인이 있는 것 마냥, 절대로 내 것은 아닌 것 마냥 받아들이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글을 쓰며 뒤를 돌아보니 나는 늘 정의롭게 또 성실하고 바르게 살았으며 결과 또한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좋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늘 나에게 돌아오는 건 칭찬이 아니라 채찍질과 배신, 의심, 벌칙, 죗값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칭찬을 들을 때 자연스럽게 의심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거 진짜 나한테 하는 게 맞아? 믿어도 되는 거야? 에이~ 설마."
나는 이 시간 이후로 칭찬받는 것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하려고 한다. 이제 무턱대고 겸손하기만 하지 않고 당당하게, 또 겸손하지만 나를 밑바닥까지 낮추지 않고 떳떳하게 나를 보호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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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떳떳하게 스스로를 보호하고, 칭찬을 오롯이 칭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다.
잊지 말자.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정말 잘해 왔고, 잘하고 있으며, 때론 꽤 괜찮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칭찬받아 마땅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