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머니 해도 왜 머니가 최고가 되었나?
첫 머니의 기억. 그것은 우쭐함을 넘은 '벼슬'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우리 집은 부자로 소문이 났다. 여느 시골의 농부와는 다르게 우리 아버지는 사장이란 직급으로 인부들을 부려 집 짓는 건설일을 하셨다. 동네에는 회관을 포함하여 아버지가 지은 집이 꽤 있었다.
하루는 선풍기 3대, TV, 냉장고, 전축을 한 번에 들인 날이 있었다. 집 근처 동네 사람들은 삼삼오오 무리 지어 구경을 오기도 했다. 농사만 지어 자급자족하며 한 해를 살고, TV 하나 들이기도 어려웠던 시절의 시골 마을엔 여간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돈의 가치를 알리 없는 꼬마의 눈치로도 사람들의 부러움과 동경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부러움과 동경은 어쩌면 당연한 욕구 같은 것일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과자 한 봉지를 사서 먹을 때면 우리 집은 종류별로 한 박스씩 사놓으셨고, 하시던 일을 마무리 지은 날이면 돈다발을 쇼핑백에 담아 오시기도 했다. 어린 꼬마의 기억에 "돈 잘 버는 아빠", "부자 집"이라는 타이틀은 우쭐함을 넘어 '벼슬'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머니의 기억. 그것은 '배 가른 돼지 저금통의 십 원짜리'였다.
열심히 일하시고 모은 덕분에 시내에 아파트 한 채 얻을 정도의 돈이 모였다. 아파트를 알아보고 다니던 찰나 IMF가 터졌다. IMF가 터지자 집 짓겠다는 사람들도, 아버지 일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IMF 전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뤘다면 우리는 아마 길바닥에 나 앉았으리라.
내 집에 대한 꿈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버티고 버티다 안된 엄마가 생업에 뛰어드셨다. 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까운 공장에 닭발 탈피 일이 다였다. 손이며, 목이며 부러질 듯 일을 해대도 우리 사 남매를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기엔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하루는 엄마가 돼지 저금통 배를 가르고 계셨다. 우리에게 다 내어주고 정작 자신의 차비가 없어 십 원짜리까지 새어 차비를 마련하고 계셨다. 내가 머니교를 알게 된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 번째 머니의 기억. 그것은 '사치와 꿈'이다.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새 가난의 옷은 처음부터 입고 난 것처럼 어색함 없이 내게 꼭 맞아 있었다. 엄마 또한 돈다발 쇼핑백은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아버지에게 습관적으로 돈 돈 노래를 불렀다. 그런 노래를 듣고 자라는 나로선 꿈이란 그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학 시절부터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던 나에게 대학교란 그저 사치로 느껴졌다. 꿈꾸기 위해 대학교를 가는지, 대학교를 가기 위해 꿈을 꾸는지 그것조차 나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꾸는 꿈이 직업이라고 생각했고, 그저 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돈 그것이 내 꿈이 됐다.
이때부터 나는 머니교 광신자가 되었다.
네 번째 머니의 기억. 그것은 '아이러니'였다.
고3 초 반에서 1등인 이유로 진학상담 선생님께 자주 상담을 받았다. 간호과를 선택하여 대학 진학을 하라는 취지였다. 학교의 거창한 이력에 한 줄을 얹기 위한 꼬임임을 알기에 선생님의 권유는 거절했다.
대학교를 거부할 이유는 쌔고 널렸었다. 가난한 집, 졸업도 못한 둘째 언니의 학자금 대출, 그리고 배움의 가치에 대한 무지.. 배우고 싶은 것도 꿈도 없으므로 나에게 대학교는 사치라는 정의를 내렸었다.
고3 초 오직 돈을 벌기 위해 구미 S전자에 입사했다. 고3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가며 1년 반을 일하며 목디스크를 얻었다. 건강을 잃어가며 번 돈으로 다시 건강을 찾아야 함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졌고 어떤 의미에선 역겹기까지 했다.
다섯 번째 머니의 기억. 그것은 '밑 빠진 독' 이였다.
목디스크로 강제적 퇴사 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건강을 팔아 번 돈으로 건강을 되찾으려 병원을 다니길 2년 내 몸은 조금씩 나아졌다.
처음부터 거액의 월급을 맛 본 나에게 머니의 달콤함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웬만한 직장은 시시했고, 대학도 나오지 않은 나에게 직종 선택의 폭도 좁았다. 그렇게 20대를 이리저리 직장을 옮겨 다니며 어중간하게 보냈다.
월 100만 원을 벌어서 방세, 세금, 휴대폰요금, 생활비등을 내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고작 20만 원 정도였다.
건강을 팔아 번 돈을 쓰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어디 삶이 그렇게 계획대로 살아지던가? 고작 100만 원짜리 계획은 늘 틀리기 일쑤였다. 결국 모아 두었던 돈도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한 달씩 버텼던 것 같다.
알 수 없는 미궁에 점 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사치도 없고, 성실하고, 심지어 알뜰한 사람인데 돈은 모아도 모아도 모이지 않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늘 마이너스였다. 왜 그런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미궁에 빠지면 빠질수록 나는 더욱 머니교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마지막 머니의 기억. 그것은 '머니교 광신자'이다.
어째 어째 살아내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은 스스로 절대 벗어나지 못할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한 도피 비슷한 게 되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와 이 힘듦을 같이 짊어지지 않으면 버틸 수 었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정말이지 오랜만에 돈에 쫓기지 않고 살게 되었다. IMF시작 이후로 처음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힘듦을 함께 해주는 신랑에게 늘 감사하다.
마음이 여유로워지자 나도 모르게 자꾸 무엇인가 꿈꾸게 되었다. 늘 가족, 연인, 아이의 꿈을 빌려 꾸던 내가 나의 꿈을 갖기 시작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오직 나를 위한 꿈을 꾸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꿈은 꿈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며, 배움은 즐거움이란 것을 서른 중반에야 깨달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꼬마일 때부터 그저 숨을 쉬면 들이마셔지는 공기처럼, 돈의 힘을 깨우치고 있었던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의 동경.. 그리고 배 가른 돼지저금통의 십 원짜리 가난.. 또 엄마의 돈 돈 노랫소리... 언제부터인가 건강하고 효도하라는 인사말보다 건강하고 돈 많이 벌라는 인사말이 흔해지면서 나는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익숙하고 빠르게 돈을 절대적인 것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여전히 내 바람 중엔 경제적 자유라는 머니에 대한 바람이 상위 중 한편에 있다. 예전엔 꿈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이젠 안다. 돈은 내 꿈을 꾸는데 필요한 수단 일 뿐이란 것을.
난 여전히 대한민국 머니교의 광신자이다. 누가 나를 욕할 것인가?
가난이 꿈의 의미를 짓밟고, 사람들이 단지 꿈은 머니를 갖기 위한 수단으로 꿈의 의미를 인식하고 있는 한, 우리는 절대 머니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과연 당신은 머니교에 속하지 않는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대한민국 머니교의 해체를 바란다. 그럼에도 돈이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하는 대한민국을 살아내고 있는 이상 나는 여전히 대한민국 머니교의 광신자 중 한 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