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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아버지가 보내준 새 취미

부끄럽지만 용기 내보는 첫 글


2013년쯤이었을까? 휴대폰 화면 위로 '아버지'라는 글자가 조급하게 윙윙 대고 있었다.

평소 살갑게 안부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기에(그렇다고 서먹한 부자 사이 또한 아니다.)

 내 맥박은 전화기 진동과 템포를 맞추며 바삐 뛰기 시작했다. '집에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걸까?' 우려가 빠져나가기도 전에 급하게 뱉어내는 걸걸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바쁘나? (내 대답은 듣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내 졸업한 국민학교가 100주년 기념집을 낸다는데 거기 실릴 기념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번 주까지는 써달란다. 하나 써봐라"


군더더기 하나 없는 담백한 명령이었다.(아버지 입장에선 매우 정중한 부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당황스러웠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사이에 다이어리 쓰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었고, 다이어리 빈 공간을 채우는 만족감 때문에 아무 말 대잔치를 끄적거린 게 내 마지막 글쓰기였다. 게다가, 공부하기 싫어 수업시간에 몰래 읽던 소설책도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작별했던 나였다. 그런 나에게 "하나 써봐라"  한마디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막돼먹은 직장상사도 일을 줄 때 최소한의 정보는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내 손에 쥐여준 것이라곤  '국민학교, 100주년 기념글, 이번주' 이 세 마디가 다였다. 아버지가 졸업한 국민학교 이름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과연 이걸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버버~"와 "네..."  사이쯤 어떤 소리를 낸 것 같긴 한데 전화는 끊겨 있었고, 내 머리는 이미 합리화를 시작했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니까 거절할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거절이든 저항이든 뭐라도 해 볼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기 때문에 부탁은 어느새 명령으로 둔갑해 버렸다.)


흠. 어쨌든 '뭐라도 써야 한다. 써내야 한다'는 부담과 '어떻게 쓰지? 뭘 쓰지?' 하는 고민만 남았다. '이틀이나 남았다.'와  '이틀 밖에 안 남았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던 내 큰 머리는(외형적으로) 모든 정보를 동원해 검색을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할아버지 댁을 자주 들락거린 탓에 집에서 학교까지 동선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동원한 모든 정보란건 그게 다였다.


자. 차분하게 책상에 앉아 '글쓰기'란걸 시작해 보자.


한참이 지나도 첫 문장을 쓸 수가 없었다. 문장은 고사하고 제목조차 쓸 수 없었다. 한 글자도 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이젠 머리가 아닌 눈으로, 손으로 검색을 시작한다.


감사하게도 나는 인터넷이 되는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고,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훌륭한 격언도 알고 있으며, 인터넷에서 슬쩍한 글 한 조각이 작은 시골 학교 기념글 첫 문장으로 쓰인다 한들 표절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을터란 것 또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여기저기 기웃대다가 첫 문장에 알맞을 법한 문장 하나를 발견하고 나름의 각색 작업을 거쳤다.

그리고는 그 문장을 자판에 때려 박았다. 첫 문장이라는 산은 이렇게 이름모를 누군가의 도움으로 겨우 넘겼다. 첫 번째 고난을 넘어서고 나니 생각보다 수월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겁먹은 것에 비해서 수월했다는 의미다.)


내가 염두한 포인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버지 나이대에 맞게 어른스럽게 써야 한다. 다른 하나는 최소한의 정보로 최대한 늘려 써 분량을 맞춰야 한다. 였다 하지만 난 어른스럽게 쓰는 방법을 몰랐다. 고민 끝에 결국 야매스럽게 한자를 여기저기 집어넣는 방법을 택했다. 이 방법은 소위 '있어' 보이는 효과뿐 아니라 다소나마 분량을 늘려주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곤 통학동선과 풍경 이 두 가지 디테일을 사골 우리듯 우려서 분량을 맞추는 방법으로 근본 없는 글을 써나갔다.


시작할 땐 두려웠는데 쓰다 보니 소설가가 된 것 같아 잠깐 재밌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꼼수로 버티기엔 비루한 실력은 금세 바닥났고, 매듭을 어떻게 지어야 할지를 몰라 한참을 쩔쩔매다 대충 엉성하게 마무리한 뒤, 잽싸게 정신승리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잘했어. 넌 최선을 다했어. 마음에 안 들면 안 내겠지 뭐... 등등'


어쨌든, 난 그렇게 (아버지 관점에서 쓴 글이긴 하지만) 기념글이라고 하는 첫 글을 완성해 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지금,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그때 대필했던 내 첫 글의 파일을 발견하고 읽어봤다. 아버지 이름으로 실린다는 부담감에 당시엔 나름 공을 들인 흔적 같은 것도 엿보였다. (아무리 공을 들였다 한들 인위적이고 어색한 느낌은 가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읽다 보니 당시 완성했을 때 느꼈던 뿌듯함이 생각나기도 하고, '내가 쓴 글을 나중에 읽어보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하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도 느껴졌다. 그러자 갑자기 생각이 호기롭게 진군한다. '글을 써보고 싶다. 조금은 제대로 된 글을 써보고 싶다.'는  능선까지 돌격해 버린다. 이를테면 본인이 처음 끓인 김치찌개를 먹다가 '어랏! 먹을만하잖아. 좀 배워서 식당이나 차려볼까?"하는 심정이랄까?


하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난 또 모르고 있었다. 책을 읽는 것부터 해야 할지 글 쓰는 방법이 담긴 책을 사는 것부터 해야 할지 잠깐 생각하다가 유튜브에서 얼핏 들은 카카오브런치가 기억나서 방문했다.


가입도 비교적 간편했고, 카테고리도 잘 나눠져 있어 관심사별로 읽고 쓰기 좋게 편의성도 잘 갖춰져 있어 보였다.(디지털 고자인 내가 쓰기에도) 일기를 쓰기도 적합한 것 같고, 나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무언가를 써보기로 결정했다. 일주일에 한 두 개의 짤막한 글이라도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대강 훑었을 때, 짧게 쓰는 사람도 제법 보였다) 뭐라도 계속 쓰다 보면 늘지 않겠는가? 근육도 쓰다 보면 단련되듯 내 쪼그라든 뇌도, 갇혀있는 생각도, 미천한 글재주도 자꾸 쓰다 보면 늘지 않겠는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삶의 색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재미가 지속된다면 '새로운 취미'라고 떠벌거릴 날이 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카카오 브런치에 올리는 첫 글을 '아버지가 보내준 새로운 취미'라고 이름 붙이고, 부끄러운 마음을 이겨내고 용기 내서 '저장' 버튼을 눌러본다.


* 동기가 되었던 아버지의 기념글을 기록으로 남겨놓는다.




내 생(生)의 진보(眞寶) 그리고 모교(母校)


진보(眞寶)는 내 젊은 날의 추억을 쌓아놓은 노적가리다. 거리거리 골목골목 내 발자국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나무 한 그루, 바람 한 점, 햇살 한 줌조차 나와 생경한 사이가 아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낯설지 않고, 창공을 유유히 흐르는 구름 떼마저 초면 같지가 않다.


총총히 어울려 있는 삼거리 상가를 벗어나 휘 둘러보면 너른 논과 밭, 청송(靑松)이 우거진 산마루가 시골의 정취(情趣)를 풍겨낸다. 이 정취 속에 내 청춘(靑春)이 있고, 또 그 안엔 유년(幼年)이 있다.


나고 자란 이곳 진보(眞寶)에서 나는 들길을 따라 학교를 다녔다. 돈골마을에서 한참이나 걸어야 했던 등하굣길은 길목길목이 놀이터였고, 운동장이었다. 요즘과 달리 배움의 기회가 귀하던 시절이라 학교 가는 길은 험하고 멀어도 언제나 즐거운 꽃길이었다.


당시 나를 비롯하여 학교를 다니는 동무들 대부분은 빈곤한 농사꾼의 자식들이었기에 방과 후엔 다들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고, 바쁜 농번기철엔 행여 학교에 안 보낼까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요즘 아이들보다 학교가는 길이 더 진하게 남아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공부 외에도 많은 것들을 가르쳤다. 많은 아이들이 복작대던 작은 교실의 단체생활에서 자연스레 질서를 배웠고, 선생님들은 모든것이 부족했던 시대적, 공간적 환경에서 아이들이 죄악에 병들지 않도록 매운 매질로 인성의 우선됨을 훈육(訓育)했었다. 이 과정을 거치며 우리에겐 차츰 소양(素養)이 돋아났고, 남을 돕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아량(雅量)이 키워졌다.


유소년기(幼少年期)의 배움들은 튼튼한 청춘(靑春)의 뼈대가 되고, 든든한 장년(壯年)의 거름이 되었다. 나아가 가정을 꾸리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제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팍팍한 일상의 피로가 쌓일 때 돌아볼 수 있는 기억의 휴식처가 되었다.


고향을 떠나 타지의 직장에서 소임(所任)을 하다가 중년의 나이를 거쳐 사회적 수명이 다해갔을 때쯤, 나는 내가 나고 자란 내 고향 진보(眞寶)에 다시 터를 잡았다. 예전에 비해 번화해지긴 했지만, 내 청춘의 풍경을 머금고 있는 이곳 진보(眞寶)는 앞으로 맞이할 노년(老年)을 준비하기에 이상적이다. 여기에는 어린 날의 정취(情趣)가 있고, 산과 들의 익숙함도 있다. 그리고 나를 알아봐 주는 이의 반가움도 있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회귀(回歸)했고, 다시 한번 이곳에서 새로운 소임(所任)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지나는 길에 내 모교(母校)인 진보국민학교를 지나다가 문득 모교(母校)의 모자가 “어미모”자를 쓴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 얼마나 적절한 말이던가! 아이가 나면 어미는 아이를 잘 기르고 가르치고자 하듯이, 내 모교(母校)도 어쩌면 어미와 같은 마음으로 나와 내 벗들을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콧날이 시큰해졌었다.


곧 있으면 어미의 품과 같은 정(情)이 있는 내 모교(母校) 진보초등학교가 100주년을 맞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벌써 50여 년이라는 유수(流水)와 같은 세월이 놀랍기도 하지만 100년이란 시간 동안 늘 굳건하게 어미의 모습으로 훌륭한 인재들을 양성한 역사(歷史)에 존경이 앞선다.


이제 나는 내가 나고 자란 이곳, 그리고 노년(老年)을 함께할 이곳 진보(眞寶)에서 모교(母校)인 진보초등학교를 계속 지켜볼 수 있음에 평생을 감사해하면서 살 것이다.

또한, 모교(母校)가 앞으로 발전을 거듭해 200주년 300주년의 역사(歷史)를 이어나가기를 돈골마을 사과밭에서 진심을 다해 응원하면서 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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