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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우리 회사의 관상

인생 첫 스피치

201X년 회사의 경영진이 바뀌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새로운 경영진은 직원들에게 색다른 불편이 가득 담긴 선물보따리를 꺼내놓는다.


그중 하나가 '1일 1인 3분 스피치'였다. 직원들이 매일 돌아가며 아침 9시 정각부터 3분간 사내방송으로 스피치를 하라는 것이다.


어떠한 가이드라인도 없었다. 이를 하달받고 온 팀장은 단 한마디의 부연만 덧붙였을 뿐이다. '까라면 까야지 뭐~"라고.


새 경영진의 눈에 들기 위한 고위간부들의 충성심은 사내 방송 음향시스템을 단 하루 만에 업그레이드시켰다. 3분 스피치는 빠른 속도로 시행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을 준 자나 선물을 받은 자나 이 스피치의 목적과 효용, 발표 순서 따위엔 일절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결국 지시사항이 이행되었냐 이행되지 않았냐에만 귀추가 주목된다.


이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자, 누구부터 할 것인가? 먼저 매 맞을 대상을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도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몇몇 팀장들이 제안했다. 첫 번째 주자를 선정하고 그 주자가 다음 주자를 지목하는 릴레이로 이어가자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첫 번째 주자는 짬밥순으로 막내직원부터가 되겠지만 막내부터 시켰다는 뒷말이 두려웠는지 그들은 그나마 소위 말 좀 잘한다고 하는 4-5년 차 직원을 첫 주자로 지목했다.


그렇게 지목된 선배는 당장 다음날 아침 스피치를 준비했고, 불운하게도 당시 그 선배와 친했던 나는 첫 방송을 노심초사 들을 수밖에 없었다. 불길한 우려대로 스피치를 마친 선배는 다음 주자로 나를 지목했다. 마음이 급해지고 심박이 올라갔다. 나는 체질적으로 마이크라는 존재 자체를 흉물이라고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다. 소소하게 몇몇 모인 자리에서는 시답잖은 농담도 곧잘 하는 성격이나 그게 다였다. 다수 앞에서 말한다는 것은 내 입장에선 끔찍한 일이었다. 더구나 이건 회사 전 직원이 듣는 사내방송이 아닌가?


어쩔 수 없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도 부지런히 주워 담아봐야 했다. 3분이란 시간 동안 얼마만큼의 말을 뱉어내야 할지 전혀 감이 없었다. 다만, 예전에 TV로 보던 1분 뉴스가 떠오를 뿐이었다. 아. 1분 뉴스를 3 꼭지나 달아 말할 정도의 긴 시간이구나 정도의 막연한 두려움만 일 뿐이었다.


대본을 써보기로 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생각을 정리해서 상대방의 귀에 꽂아 넣는 행위고, 글은 상대방의 눈에 때려 박는 행위다. 별반 다를 게 없다고 내 자신을 타이른다. 대본을 써서 그대로 읽기로 한다.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세련된 말하기의 톤, 억양 강조 포인트 따위는 기억 저편으로 처박아두고, 멋들어지게 잘해야지 하는 욕심들도 한편으로 밀어놓는다. 적당히, 아니 최소한만,  아니, 들었을 때 욕 안 먹을 정도만 딱 그 정도만 하자며 나를 달랜다. 하지만 아무리 타일러봐도 2번 주자는 극심한 부담이다.


대본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막막하다. 학교 다닐 때 국어시간을 떠올려 봐도 소재와 주제가 어쩌고 저쩐다는 내용밖에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난다 한들 지금 상황에 한 줌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란 건 알지만.


책상을 살핀다. 허영만 만화책 "꼴"을 집어든다. 읽고 던져둔 만화책이다. 훑어보다가 이 만화책의 내용을 차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 최소한 소재와 분량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될 법 싶었다. 뭐라도 시작한 기분이 들기 시작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그렇게 나름의 대본을 써 내려간다. 동네 개들을 모아놓고 말한다는 생각으로 써보니 의외로 부담이 제법 줄어든다. 술술 풀리는 느낌이다.


손으로 쓰고 눈으로 읽고를 몇 번 반복하고 몇 가지 어색한 부분을 고쳤다. 최종본을 읽어보니 크게 어색한 부분은 없다. 내심 잘 완성한 나 자신에게 합격점수를 매긴다. 이제 마지막 테스트로 타이머를 켜고 소리 내어 읽기를 시작한다.  


깜짝 놀랄 일이 벌어진다. 3분에 딱 떨어지는 것은 고사하고 2분도 근접하지 못한다. 분량이 택도 없이 모자란다. 조급하게 읽어서 그런 건가 싶어 거의 0.5배속(기분상) 느린 속도로 다시 읽어보지만 단지 몇 초만 더 채워졌을 뿐이다. 말과 글의 괴리를 몸소 깨닫게 되었다. 라디오 디제이들과 작가들이 새삼 한없이 존경스러워진다. 고작 3분을 채우는 데도 이렇게 진이 빠지는데 그들은 2시간씩 공백 없이 멘트와 노래를, 광고와 사연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방송을 내보내는 것이다.


어쨌든 부족한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게 되었으니, 부사를 억지로 꿰맞추고, 별 쓸데없어 보이는 문장도 한 줄씩 추가해 넣어본다. 적당한 분량이 나왔다. 긴장해서 급하게 다다다다~ 읽지만 않는다면 3분을 꾸역꾸역 채울 것 같다. (혹시 긴장해서 다다다~ 읽어버릴 것을 대비해서 10초 정도 분량을 더 채워두는 센스가 나에게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내 생애 첫 스피치의 대본 작업이 끝이 났고, 다음날 나는 긴장한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내 대본을 읽어나갔다. 후에 들은 바로는 반응은 대체로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긴장한 티가 많이 났으나 그 긴장한 목소리가 나름 귀여운 포인트였다고 마음씨 좋은 선배 몇몇이 위로어린 평가를 해 줬다. 대본을 책 읽듯 읽긴 했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이크에 대고 처음으로 해 본 경험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별 거 없는걸?' 같은 자신감 비슷한 것도 생긴 거 같았다.

로테이션으로 다음 차례가 돌아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나름의 기대도 생겨났다. 다음 주자는 어떤 스피치를 할까? 누가 제일 센스 있게 대본을 쓸까? 하며 혼자서 해보던 계산들은 일주일도 안돼서 완전히 소각되었다.


'아침부터 방송하니 정신 사납네'라는 최고경영자의 한마디에 스피치 프로그램은 즉시 전면 중단되었다. 기대가 있었다고는 했으나 여전히 부담이 더 큰 상태였기 때문에 마음 한쪽은 쾌재를 불렀고, 다른 마음 한쪽은 몇 명만 희생당했단 사실에 억울해했다. 아무튼 그렇게 내 생애 첫 스피치는 막을 내렸고, 그 이후로 나는 여전히 마이크는 흉물스러운 존재라 생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3분 스피치의 대본을 여기에 기록해 놓는다.


*당시 했던 3분 스피치 내용



안녕하십니까? 어제 000 대리로부터 잘생기고 똑똑하고 겸손하고 심지어 유머감각까지 겸비되었다고 오글거리는 소개를 받은 00팀 000입니다. 멋지고, 재미있고, 센스 있고, 의미 있는 말을 기대한다는 멘트에 밤새 바들바들 떨었습니다. 사실 저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를 때도 1절만 부르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3분이란 긴 시간 동안 마이크를 독점하는 것이 첫 경험입니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떨리는데요. 많이 어색하더라도 이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가 스피치 할 주제는 관상입니다. 관상이라 하면 점이나 미신처럼 생각하시는 경우가 많은데요. 관상을 보는 학문 즉 상법은 사실 수 천년동안 복 있는 자들의 생김새를 집대성한 통계학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훌륭한 통계학을 허영만의 만화 “꼴”이라는 전문서적(?)을 통해 습득하게 되었는데요.

이 서적은 글보다 그림이 많아 저처럼 똑똑하고 학구열이 강한 00 여러분들이 읽기에 아주 좋을 겁니다.


오늘은 기본적으로 좋은 관상에 대해 짧게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초년 운을 나타내는 이마는 넓고 반듯하게 잔털이 없고, 인기의 지표인 눈썹은 정갈하게 한결로 길고 진하게 돋아있으며, 통찰을 나타내는 눈은 가늘고 길게, 눈동자는 진하고 생기를 띄고 있는 것이 좋은 관상이라고 합니다. 재물운을 나타내는 코는 크고 봉우리가 둥글어야 하며, 광대는 적당히 솟아있어야 이웃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입술은 입꼬리가 올라가 있어야 식복 있는 좋은 입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좋은 관상에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 00팀 000 직원의 실망하는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한데요. 너무 실망하지 않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생김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얼굴의 빛깔, 즉 낯빛이니까요. 얼굴 좋아졌네~ 훤해졌네 라는 말씀들 많이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이처럼 얼굴의 색을 통해 전체적인 관상을 보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고 합니다. 얼굴은 오장육부의 반영체라서 오장육부가 튼튼하고 건강하면 혈색이 좋아지고 쾌청한 낯빛을 가지게 됩니다. 맑은 낯빛은 건강한 기운을 풍기고, 건강한 기운은 만복을 가져오게 된다고들 합니다. 그러하니 우리 00 직원분들 특히 00팀 000 직원께서는 얼굴 생김에 대해 낙담하지 마시고 오장육부가 튼튼해지도록 항상 건강관리 하시어 좋은 낯빛으로 복을 몰고 다니시는 분들이 되시길 바라봅니다.


한 말씀만 더 드리자면 저는 개인의 관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직장인 00의 관상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00이라는 우리 조직의 얼굴은 사람의 오장육부에 해당하는 직원분들이 모여 결정하게 됩니다. 직원분들 한 분 한 분이 건전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역량을 발휘했을 때 우리의 직장 00의 얼굴은 빛나고 복이 깃들게 될 것입니다. 직원 여러분 오늘도 건강한 00의 얼굴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2024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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