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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편의점

관점의 변화에 대하여

출근길 적색 신호를 받고 정차한다. 라디오처럼 틀어놓은 유튜브 영상에서는 모 교수가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해 논리 정연하게 설파하고 있다. 글감이라는 대목을 얘기하는 중이다. '글감노트를 만들어라, 글감은 일상에서 늘 존재하는 것이니 관찰하는 습관을 가져라' 등의 얘기를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또 뻔한 소리~ 누가 그걸 모르나? 그게 어려운 거지." 하며 흘려들었을 말들이나, 요즘 내 귀는 순한 양처럼 들려오는 이야기를 향해 한껏 몸을 낮추며 받아들인다. 끔찍히 싫어하던 자기 계발서 몇 권을 꾸여 꾸역 읽어낸 탓인지, 나아가 그중 몇 가지는 실천도 해보고 효과를 꽤 봤다고 여겨서인지는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면 몇 번 맞아본 풍파에 겸손이  내 마음에서 적당히 돋아나서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들은대로 관찰하는 습관을 즉각 실천해 보고 싶다.


주위를 살핀다. 차도 우측으로 CU편의점이 보인다. 편의점.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상점? 정확한 사전적 정의까지 알 리 없다. 편리한 상점이란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것이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저 애초에 편의점을 기획한 자가 붙여놓은 하나의 명칭일 뿐이지 않은가. 지금 내 눈에 보이는 편의점은 방금 유튜브 강의에 설득당한 자가 관찰자 입장으로 주변을 살피다 찍어버린 피사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순식간에 글감은 정해졌다. 재빠르게 편의점을 주제로 뭘 써야 할지에 대해 두서없는 스크린을 시작한다. 편의점 이용 빈도? 장점? 창업 배경? 편의점을 대하는 내 인식? 의외로 많은 재료들이 튀어나온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봐야 하는 귀찮은 재료들은 즉시 머릿속에서 소거한다. 결국 “편의점에 대한 내 생각” 이라는 주제 하나만 남는다. 소주제까지 일사분란하게 정해진 셈이다. 신호를 보니 아직 파란불로 바뀌지 않았다. '생각보다 짧은 시간에 내 뇌가 많은 일들을 생각해 냈군' 이란 생각까지 추가 했음에도 여전히 파란불이다. 빠른 두뇌 회전에 우쭐한 기분이 잠시 차오른다. 하지만 신호가 바뀌고 남은 출근길을 운전해 가는 동안에도 "편의점에 대한 내 생각은 음...."만 무한 반복되어 간다. 잠깐 부풀었던 교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금세 쪼그라든다.





출근 후, 지난주에 하기로 했다가 지금까지 미루어뒀던 회의부터 하기로 한다. 더 미룰 수는 없다, 오늘은 어떻게든 처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회의가 시작됐다. 최근에 본 영상인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회의 때 "타인의 말을 잘 들어라"는 생각이 불현듯 깜빡이를 켜고 들어온다. 이 생각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게 마음의 공간을 내주고, 업무 안건 생각은 속도를 줄여본다. 회의 내내 '타인의 말을 잘 들어라'가 위협받지 않도록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 신경 쓰며 회의에 임한다. 회의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고, 난 배운 것을 또 하나 실천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잠시나마 취한다.





자리에 앉아 출근길에 하던 생각을 이어 나가 본다. 편. 의. 점.

편의점에 대한 나의 생각?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멈췄었다. '나는 편의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한 줄만 머릿속을 돌고 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나는 편의점을 좋아하지 않았다. 편의점을 처음 알았을 때 부터 편의점을 비싼 곳으로 인식했고 그 인식은 정말이지 오래갔다. 당시 편의점은 지금처럼 1+1, 2+1 행사 따위가 없었기도 했고, 상품의 종류 또한 다양하지 않았다. 그저 야간에도 운영하는 작은 슈퍼마켓으로서의 기능을 할 뿐이었다.


일반적인 학생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부모님 지원으로 용돈을 마련한다. 그들은 부족한 용돈을 나름의 방식으로 아끼는 습관을 만들어가고 가치관에 따라 절약 습관은 다양하게 갈라진다. 당시의 나는 주로 먹는 것에서부터 소비를 줄이는 경향이었는데 그런 나에게 슈퍼마켓보다 비싼 편의점이 곱게 보일리 없었다. 따라서 내가 편의점을 이용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급하거나 슈퍼마켓이 모두 문닫은 야간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간혹 바로 옆에 슈퍼마켓이 있음에도 거침없이 편의점을 이용하는 친구를 볼 때면 신기하면서도 조금 불편했다. (당시엔 이것도 가치관의 영역이란 걸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최근엔 편의점에 대한 내 인식이 많이 변했다. 사실 인식이 변했다는 말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하나의 대상에 대해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때 인식이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진대, 과거의 편의점과 현재 편의점은 실제로 많이 달라졌다. 물론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편의점이 사람들에게 편리하게 이용할 장점을 제공한다는 것은 변함없지만 현대의 편의점은 PB, 기획상품을 포함해서 진열 상품 종류와 구성이 훨씬 좋아졌고, 택배서비스도 생겨났다.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상대적 가격이 훨씬 저렴해졌다. 사실 상품의 종류가 늘었다거나  택배서비스가 시행되었다는가 하는 것들은 내 인식 변화에 하등 영향이 없을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패스트푸드와 인스턴트 음식과 개인적으로 택배를 주고받는 수고스러움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졌다는 것은 다른 영역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꽤 큰 변화이고 중요한 영역이다. '내 가치관의 우선순위는 그저 가성비, 돈, 가격이랍니다.'라고 떠들고 싶은 게 아니다. 물론 이왕이면 뭐든 좀 더 싸게 사고 싶은 열망과 가성비 소비를 하겠다는 의지는 여전하다. 이는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럴 것이다.





 가격이 저렴해졌다는 의미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가격이 저렴해졌다고 말해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다른 것에 비해 편의점 물가가 상대적으로 덜 올랐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수 있겠다.

최근 외식물가는 걷잡을 수 없다. 학교 앞 분식집도 아이들의 박한 용돈으로는 자주 들리기 힘든 수준이 되었다.(우리 집 애들 용돈 기준) 하물며 성인 남성들이 찾는 술집들 가격 인상폭은 어떻겠는가. 실로 엄청난 인상폭이다. 서민 술의 대명사인 소주도 병당 6000원이 기본인 시대다. 생맥주라도 마시려 들면 한잔에 7-8000원씩 줘야 하기에 이제는 '500 두 잔 더 요'라고 외치기 전에 머뭇거리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그에 비해 편의점은 상대적으로 심리적 안정감 있는 가격으로 술을 판매한다.  소주 한 병 가격은 천 원 초반에 수입맥주들도 4캔에 만원이라는 이벤트를 상시 열고 있어 성인 남성들의 발길이 종종 닿아진다.

게다가, 요즘 편의점은 카페에 있을 법한 예쁜 디자인의 파라솔과 테이블도 구비해두고 있고, 각양각색의 레트로 식품들도 있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여느 술집 못지않게 근사한 안주도 차려놓을 수 있어 분위기 있는 술자리도 가능하다.


내 관점에서의 요즘 편의점은 더 이상 게으르고 검소하지 못한 이들의 공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과거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의 나에게는 서민적이고 실용적인 사람들의 공간으로 인식된다. 친구와 가볍게 하는 술자리도, 아이들과 운동 후 먹는 간식을 찾기에도 편의점만 한 곳이 없다. 가격 부담면에서도, 대기업의 위생 관리면에서도, 골목마다 찾을 수 있는 접근성 측면에서도 편의점을 대체할 무언가를 제시하기 어렵다.

이렇게 편의점에 대한 과거와 지금의 내 인식은 완전히 변화해 버렸다. 이는 내 인식의 변화가 아니라 시대 흐름에 따라 편의점 자체의 포지션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

마치 내 아버지 세대의 포장마차처럼 우리 또래에게 편의점은 과거의 포장마차 역할을 대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그에 따라 나도 변한다. 변하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붙들고 있어 본 들, 가련한 인간은 변화의 유속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또한, 변화에 몸을 맡기지 않고 버티는 것이 옳은 일도 아니며 멋있는 일도 아니다. 변화를 감지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며, 스스로 취할 행동을 골라낼 사람이 되고 싶다.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의식을 동원해 생각해보지 않으면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다. 주변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아내라는 이름으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그들 또한 각자의 변화와 성장을 꾀하고 있다. 고고하게(?) 콧대 높던 편의점이 문턱을 낮추고 지금의 나에게 오라고 손짓하듯 내 가까운 사람들도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막연하게 눈에 보였던 편의점이라는 주제로 드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써봤다.

생각이 흐르는 대로 아무렇게나 써보자 하고 마음을 내려놓고 시작했다. 허나 이 또한 쉽지가 않다. 생각이 자꾸 여러 갈래로 흩어지고, 방향을 잃는다. 어질러진 방을 치울 때도 어렴풋한 계획을 세워고 시작해야 효율이 있을텐데 구성도 목차도 없이 무모하게 써본 탓이리라. 다음에는 전체적인 구상하기부터 머리에 담은 뒤 써보도록 하자. 연습과 경험의 데이터를 하나씩 쌓아가도록 해보자.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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