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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웃으세요^^

병원 X-RAY 

손가락 골절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xxx병원을 방문한다. 도착과 동시에 수납하고 영상의학과에 검사 의뢰를 하고, 진료과에 가서 도착 접수를 미리 해둔다. 그런 후 엑스레이 2번 검사실 앞 의자에 앉아 대기한다. 여기까지 진행이 이제 익숙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빠르게 내 이름이 호명된다. 기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엑스레이 검사실로 들어간다. 촬영을 위해 평소대로 엑스레이 기계 위에 손가락을 올리는데  엑스레이 기계 위에 때묻은 반절짜리 A4지가 성의 없게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위로 네 글자가 보인다.


"웃으세요^^"  



자기 계발서에 자주 등장하는 꼭지 중 하나가 "웃을 일이 없어도 웃기부터 해라"이다. 관련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풀어보자면 '생각을 하고 느낀 후에 행동이 나온다는 선입견에서 벗어나라. 인간의 뇌는 그렇게 정직하지 않다. 행동을 먼저 하고 나면 생각이 행동을 따라 변한다. 따라서 미소부터 짓고 나면 부정한 생각들이 웃음에 따라 금세 사라지기도 한다' 뭐 대충 이런 이야기다. 그 말이 사실인지 테스트 당하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지난 7-8주 동안 이 병원을 올 때마다 항상 2번 검사실에서 엑스레이를 촬영했다. 하지만 여태 저 문구를 보지 못했었다. 아니, 눈으로 봤을 수는 있겠지만 인식하지 못한걸수도. 그런데 갑자기 저 글귀가 눈에 들어온 이유가 뭘까? 곱씹는다. 어설프게나마 읽어 댄 자기 계발서 영향 탓일까? 아니면 새벽 달리기를 하고 나와 기분이 좋아서일까? 아무래도 좋다. 적어도 저 글귀가 눈에 거슬리지도 않거니와 (피식~이지만) 웃음까지 튀어나왔으니까.


예전의 나는 상당히 부정적인 사람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떤 것을 시작하고 계획 함에 있어 최악의 상황을 먼저 그리는 습관이 있었다. 그게 일이든 연애든.


일이야 리스크를 고려해야 하니 냉철한 타입이었노라고 애써 변명해 보겠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다. 연애를 시작하는 출발선에서도 이 감정이 사그라들었을 때를 미리 걱정하고 나중에 덜 상처받기 위해 내 행동을 제약했다. 당연히 내 연애는 (다른 사람들의 연애에 비해)무심했고, 얕았다. 심지어 이런 내 연애 철학을 무슨 자랑인냥 상대에게 일장연설하는 잔인한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다.)


예전의 나였다면 "웃으세요^^"를 보고 왜 넌 명령문이니? '웃으면 복이 온대요. 당신이 웃었으면 좋겠어요.'  같은 친절한 문장들도 많은데 넌 왜 앞도 뒤도 없이 [웃. 으. 세. 요.] 단 네 글자뿐이니?'라고 시비를 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오늘 내 마음은 저 네 글자를 이쁘게 받아들였다. 놀라운 발전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은 입체적이라 부정적일 때도 있고, 긍정적일 때도 있다. 혼탁하게 뒤섞인 자기 마음에서 어느 쪽으로 비중을 실을지에 대한 선택은 오롯이 본인의 몫이다. 물론 태어나고 자란 환경 탓에 우리가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부정적으로 굳어 버릴 수도 있지만 그중 몇몇 사람은 굳어진 환경에서 탈출하고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다. 긍정적인 사람들이 더 많은 집단으로 자신을 밀어 넣어 보기도 하고(그게 학교 든, 직장이든, 사는 동네든), 그것마저 여의치 않다면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을 통해 내면의 자신과 싸워내면서 방향을 옮기기도 한다. 물론 둘 다 행 하는 사람도 있고.


과거의 어떤 일들이 내 마음에 부정을 싹 틔웠을까? 아무리 돌아본 들 알 재간이 없다. 다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나는 지금 과거의 내가 부정적이었단 것을 깨닫고 있고, 조금씩 부정의 싹을 잘라내고 있는 과정 중 있다는 것이다.


그냥 지나쳐버렸을 네 글자 "웃으세요^^"가 내 눈에 들어온 건 '너 잘 변하고 있어. 좀 더 힘을 내서 남아있는 부정적인 마음을 더 지워봐 봐" 하면서 격려하는 신의 선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기분 좋은 수요일이다.



2024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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