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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하다 Jul 08. 2024

걱정



걱정이란 놈이 마음의 문을 단박에 부수고 들어오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대부분은 작은 걱정거리가 내 방문을 노크할 뿐이다.


내 관점에서 걱정걱정거리는 비슷한 듯 하지만 차이가 제법 있다. 불리한 현상이나 행위의 고민이 깊어져 정신과 육체가 지배당한 상태가 걱정이라면 걱정거리는 그 불리한 현상과 행위가 발생은 하였으나 적어도 내 몸 전신을 파고들지 못한 상태라고 나름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암으로 치자면 걱정거리는 종양이 발생한 상태이고, 걱정은 암세포가 퍼져버린 상태처럼 말이다.


이런 정의에서 본다면,

걱정거리걱정으로 확산되기 전에 충분히 방비할 수 있어 보인다. 걱정거리가 마음의 문을 노크했을 때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절대 말처럼 쉽지 않다. 걱정거리를 알리는 노크는 현관문을 부숴버릴 기세를 가진 강도의 윽박처럼 공포스럽게 찾아오기 때문이다.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찾아온 걱정거리를 문전박대할 정도의 배짱과 체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방문한 걱정거리를 융숭히 대접해서 고이 내보낼 만큼 아량과 위엄도 갖추지도 못했다. 나약한 우리는 그저 공포에 질려 문을 열고, 걱정거리걱정으로 몸집을 키워가는 모습을 지켜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걱정거리를 안고, 걱정에 싸인 채 살아간다. 누구도 '걱정'이란 관념에서 자유롭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걱정'을 마주하는 방식에서 차이를 둘 뿐이다. 어떤 이는 사소한 걱정거리를 크게 키우고, 또 어떤 이는 주어진 만큼만 걱정한다. 그 수가 적긴 해도 또 다른 어떤 이는 어지간해서 걱정거리를 시답잖게 치부해 버리기도 한다. 물론 나눠 본 세 유형의 공백 안에는 셀 수 없는 사연들이 층을 지고 있어 구분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 걱정의 무게에 따라 타입별 장단점이 존재하기에 뭐가 옳다 그르다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몸을 파고들어 비대해 버린 걱정이 서서히 정신을 잠식하고, 건강을 피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것에는 많이들 공감할 것 같다. 또한, 이로 인해 얇아 진 심신이 걱정이란 무게에 눌려 어느 한 곳에 구멍이 나버릴 위험도 있기에 우리는 걱정에 대해 그리고 걱정거리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미리 대비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조금 더 이완된 시각으로 말하자면 '걱정' 그 자체를 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가벼운 걱정은 깊은 고민의 일종으로 성찰과 발전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다만 지나친 걱정은 병이 될 수 있기에 자신이 짊어진 걱정의 크기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단해 볼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걱정을 마주하는 태도, 걱정을 덜어내는 노력, 걱정에 대처하는 자세에 대해 내가 사용하고 있는 방법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이는 나만의 방식이긴 하나, 나처럼 나약한 보통의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한다.)


첫째, 걷는다. (음악을 들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지만 가급적 음악을 배제하는 것을 추천한다.) 가벼운 채비를 하고 무작정 나가서 걷는다. 주변을 보고, 공기를 의식하려 해도 걱정거리가 둥둥 떠 다녀서 어려울 것이다. 그럴 때는 떠 다니는 걱정에 오히려 집중해 본다. 꽤 두렵고 긴장되는 일이지만 걱정 요소를 오롯이 나열해 본다. 면접장이나 시험장에 들어가는 마음으로 크게 호흡을 내쉬고 원인과 진행과정을 순차적으로 꺼내놓는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 고민거리와 걱정거리가 구분된다. 게으름에서 비롯한 문제라서 내 행동을 바꿈으로 해결 가능한 문제들은 고민거리라 간주하고 털어버린다. 반면 해결책이 바로 드러나지 않고, 생각이 거듭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문제들은 꼬리를 잡아가며 그냥 계속 걷는다. 30분 이상을 걸으며 호흡이 리듬을 찾다 보면 몸이 덥혀지고,  저조했던 기분이 어느정도 사라진다. (내 집중력은 그리 길지 않기에) 1시간쯤 걷다 보면 걱정하던 주제는 슬쩍 잊혀지고 '걷는 행위'로 신경이 옮겨진다. 딛는 발걸음을 느끼고, 주변 풍경을 돌아보고, 지나가는 사람들 표정을 살피고, 불어오는 바람도 느껴본다. 이 행위에 집중하다 보면 걱정의 농도는 어느새 옅여지고, 이런 걱정 하나쯤 안 가진  인간은 없을 것이라며 자기 위안의 영역으로 빠지게 된다. 내 경우는 여기까지만 오면 소기의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깨끗하게 씻고, 걱정을 내일로 미루며 잠을 청할 뿐이다. 충분히 자고 나면 어제 했던 걱정의 상당 부분은 쪼그라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둘째, 달린다. 산책을 해도 마음의 짐이 더욱 무거워지는 경우가 있다. 해결할 묘안이 떠오르지도 않거니와, 걱정이 갈수록 깊어져 신경을 예민하게 만드는 단계이다. 식욕이 없어 먹을 수 없고, 당최 잠에 들 수도 없다. 이럴 때 나는 (시간이 몇 시든, 날씨가 어떻든)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간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한다. 드라마 주인공처럼 고함을 지르며 심장이 터져라 달리는 것이 아니다. 가볍게, 숨이 차지 않을 정도의 페이스로 어지러운 마음 위를 달린다. 숨이 차지 않게 속도를 유지하는 것에 집중한다. 피가 몸 전체로 돌고, 땀이 흥건해질 때까지 달린다. 점차 무거워지는 다리를 쉼 없이 내딛다 보면 내 머리는 더 이상 '걱정'에 대한 '걱정'을 할 여력이 없어진다. 그저 무거운 다리와 흐트러지는 호흡에만 신경이 써질 뿐이다. 이렇게 몸이 지칠 때까지 달리다 보면 모종의 성취감 같은 것이 싹을 틔운다. 다른 감정으로(모종의 성취감) 걱정을 대체하는 작전이다. 걱정은 외면할수록 그림자처럼 따라붙기 마련이다. 걱정의 그림자를 없애려면는 완전히 그늘진 곳으로 몸을 숨기거나, 태양 바로 아래서 해를 마주하며 그림자를 발 아래 감추는 수밖에 없는데 달리는 행위는 나를 햇볕 아래 두는 방식이다. 걱정에 쫓겨 자신을 습하고 어두운 곳으로 밀어 넣는 대신, 몸을 고단하게 만들어 걱정을 잠시나마 잊어보는 방식이다. 육체의 피로가 걱정에 쏟을 에너지를 앗아가다 보면, 걱정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닌 무언가가 되어버린다. 원시적인 방법이긴 해도 이 방식은 꽤 효과가 좋다. 적어도 나에게는.


하지만 위의 두 방법 모두 걱정을 '일시적으로' 피하면서 '내일'을 도모하는 방법이지 해소하는 방법은 아니다. 사실 말끔히 해소할 수 있는 걱정이란 것이 삶 속에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거니와 가끔은 예측도, 감당도 어려운 재난과 같은 불가항력의 걱정이 덮칠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위기감을 느낄 정도의 걱정을 만났을때는 걷고, 달리는 처방은 효과를 내기 힘들다. 몸에 자극을 주는 방법은 고통을 잠시 완화하는 진통제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많이 아플 때 진통제는 꽤 유용하므로 걷고 달리는 행위가 완전 무용하다는 말은 아니다.) 심각한 몇몇 문제들을 안고서는 미친듯 걷거나, 죽어라 뛰어도 금세 공허해지며, 멈추는 순간 걱정이 바로 고개를 처들기 때문이다. 이 단계까지 오면 나는 세 번째 방법을 사용한다.


셋째, 놓는다. 긍정적으로 말하면 받아들이는 것이고, 부정적으로는 포기한다는 말이다. 살다 보면 가끔 굉장히 불운한 것이 자신을 세게 때릴 때가 있다. 내 잘못도 아니고, 누군가의 잘못도 아닌데 그저 불운한 것이 찾아온 것이다. 이때의 나는 달리 방법을 찾지 못한다. 마음을 내려놓고, 최악의 상황만 그려보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런 다음엔 입술을 꼭 다물고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한다. 내가 성장하도록 시련을 준 신에게 책임을 미루면서.  이 때, 유의할 것은 신 조차 나를 버렸다느니 하는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고 걱정해서 나아질 것도 없으니 하늘에 맡겨보자.' 정도가 내가 의미하는 놓는다의 뜻이다. 불안과 허무가 한동안 마음을 어지럽히겠지만 그 시간만 견디면 된다. 무거운 짐을 계속 짊어지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빨리 놓아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위의 방법들이 뚜렷하고 속 시원한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것을 나 또한 모르지 않다. 다만 내 짧은 경험에서 더 명쾌한 방법을 찾지 못했음을 고백할 뿐이다. 그럼에도 한 편으로얼마간은 확신한다. 걷고, 뛰는 것을 시작해서 육체를 자극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건 꽤 효과적이며 감당 못할 걱정은 되도록 빨리 던지는 것이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라고.


삶에서 걱정이라는 놈은 앞으로도 평생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다. 우리는 걱정을 피할 수도 없고, 소멸시킬 수도 없다. 그저 각자 자기만의 방법으로 스스로가 덜 상처방법을 찾으려 노력할 뿐이다. 걱정이 찾아왔을 때 절망에 빠지지 말고 걱정을 다루려는 연습을 조금씩 해보자. 걱정을 비워내야 행복이 찾아 올 공간이 생기니까.


2024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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