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네 번째 이야기
저는 올해 2월부터 8개월째 달리고 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무거운 부담으로 변해버리기도 했던 달리기였습니다.("욕심은 옮겨 붙을 뿐"이라는 글에서 이 주제로 한번 이야기 했었죠.)
달리기에 대한 한때의 집착 역시 내 달리기 여정의 성장통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지금은 어느 정도 홀가분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부담을 적당히 덜어내니 그 빈자리에 달리기의 즐거움이 다시금 채워지더군요. 덕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선선해진 날씨도 그렇고, 한결 가벼워진 마음도 그렇고 참 달리기 좋은 요즘입니다.
저는 2주 뒤에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합니다. 소위 우리나라 3대 마라톤 대회라고 하는 춘천마라톤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달리기에 대한 자신감이 잠시 차올랐던 그 맘 때, 하룻 런린이 풀코스 무서운 줄 모르고 겁 없이 대회 신청을 한 거죠. 그 대회가 어느덧 2주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달리기 성장통(?)을 겪으며 이제는 달리기를 즐기자며 마인드 세팅을 다시 했지만 신청해 놓은 풀코스 완주에 대한 욕심까지는 버리지 못했기에 그간 알음알음 거리 늘리는 연습은 계속해왔습니다.
지난주엔 처음으로 35KM LSD 훈련도 성공했습니다.(Long Slow Dinstance - 마라톤 하는 사람들이 느린 속도로 거리 늘리는 연습하는 것을 LSD 훈련이라고 부르더군요) 8월 폭염의 어느 날, 35KM 도전했다가 실패한 기억이 있어서 꽤나 긴장을 했었는데 선선해진 날씨 탓인지, 아니면 평소 주로(走路)가 아닌 색다른 남산을 뛴 탓인지, 아니면 지난번 실패한 경험 안에서 몸이 깨달은 무언가가 있었서였는지, 어쨌든 부상 없이 이 훈련을 무사히 성공했습니다. (어디 자랑할 곳이 마땅치 않아 여기서라도 자랑을.... 흠흠)
유튜브에서 본 전문가들이 풀코스 대회 전에 35KM 거리를 뛰어낼 수 있어야 실제 대회 때 완주의 확률이 높아진다기에 항상 마음에 걸어 놓고 있었는데, 이제야 숙제를 다 끝냈다는 개운함이 밀려듭니다. 물론 LSD훈련이 풀마라톤 완주를 보장해주지는 않습니다. 그저 피니쉬 라인에 조금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중간 검사를 받은 것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감추기가 힘듭니다. 제가 성장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요.
사실 따지고 보면 저는 꾸준히 성장해 왔습니다. 어릴 때 매년 키가 자라는 신체적 성장을 경험하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3학년 때 풀 수 없던 문제를 풀어내는 학습적 성장도 분명 경험했지요. 병장이 되니 이등병 때 어리바리 대던 일들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생활적 성장도 겪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저는, 아니 우리 모두는 계속 성장하지요. 그런데 저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감사하거나 기뻐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성장은 삶의 당연한 수순이고,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결과라고만 생각했지요. 그 과정을 만끽하는 여유는 가지지 못했음을 솔직히 고백해야겠네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키우며 성장이라는 것에 대한 감사를 느꼈어요. 아기가 처음 몸을 뒤집던, 처음 걸었던, 처음 두 발 자전거를 타던, 그 순간순간들이 제 눈에 담기면서 저는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몸을 뒤집기 위해 혹은 걷기 위해 수없이 애쓰고 넘어지는 아기를 봐왔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성장은 삶의 당연한 수순도 아니며 자연적인 결과도 아니었습니다. 도전과 실패를 한껏 머금고 충분히 무르익은 뒤에 조금씩 커지고 나아가는 것, 그게 성장인 것 같습니다. 타인이지만 제 자신과 같은 아이를 바라보며 성장이 주는 값어치를 조금이나마 이해한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라도 저 자신을 통해 성장을 보고, 느끼고, 감사하고, 기뻐해보고자 합니다. 그 안에서 겪게 되는 도전과 실패를 소중하게 여기고, 좀 더 세심하게 그 과정을 이해하고 즐겨보고자 합니다. 조금이라도, 미세하게라도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둬보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성장 과정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달리기는 더없이 훌륭한 소재인 것 같습니다. 달리기는 일정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재능보다 노력이 우선시되고, 시간을 들여 거리를 늘려 가면 되도록 빠르고 정직하게 결과가 드러나는 운동이니까요.
저는 첫 번째 도전하는 풀 마라톤 완주를 위해 남은 기간 부지런히 연습할 생각입니다. 완주를 넘어 좋은 기록을 얻을 수도 있고, 혹은 대회 날 예상치 못한 변수에 의해 완주에 실패할 수도 있겠죠. 아직 결과는 예단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과를 얻게 되더라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올해 초만 해도 5KM 달리기 버거워하던 제가 지금은 35KM까지 달릴 수 있게 성장했고, 42.195KM의 풀마라톤까지 도전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테니까요. 이 과정을 지나면서 제가 챙겨야 할 만족은 이미 충분히 챙겼다고 생각되기에 후회 없이 대회를 즐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2주 후, 첫 풀코스 마라톤을 달릴 미래의 제 자신을 힘차게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