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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健元陵)

by 정유지

건원릉(健元陵)

사진 출처 : 조선왕릉 전문 사진작가 김상일

어디가 명당일까 검안산 기슭자락

육백년 풍상 뚫고 억새풀 뿌리내린

절경의 천작지구(天作地區)가

바로 여기 아닌가


- 정유지-




건원릉은 조선건국시조인 제1대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태조 이성계는 죽기 전에 “조상이 묻혀 있는 고향 함흥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태종은 “아버지의 유언이나 조선개국의 시조를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을 수 없다”는 이유로 태조의 유언을 듣지 않았으며 유언 지키지 못한 불효를 용서받고자 한양 80리 안에서 천하명당을 찾으라는 명을 내린다. 조정대신 김인귀 추천으로 영의정 하륜이 택지로 결정했고, 왕릉조성 공사는 경기도, 충청도 등서 6천여 명이 동원되어 70일이 걸렸다.


고향을 그리워했던 아버지 태조를 위해 태종은 함흥에서 억새풀을 가져다 봉분을 덮는다. 이곳이 천하 명당 동구릉이다.




제릉은 조선 개국의 시조 태조 이성계 첫 번째 부인 신의왕후가 묻혀있는 개성 땅을 말한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다. 하지만, 이성계의 첫째 부인이면서도 조선의 건국이전 사망하였기 때문에 조선 최초의 국모라는 영예는 그녀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이성계가 이 신의왕후보다 둘째 부인 신덕왕후를 더 총애한 덕에 신의왕후라는 이름도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덕왕후의 소생이었던 막내아들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는 등 권력의 축이 신덕왕후 측에 집중돼 있던 탓에 많은 과소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1337년에 태어난 신의왕후 한씨는 15살이 되던 1351년에 비슷한 호족 신분이었던 이성계와 혼인해 6남 2녀를 낳았고, 이성계가 고려왕조 말기에 난세를 평정하고 전쟁터 누비는 동안 집안 대소사를 묵묵히 처리하였다.


이성계가 고려 명문귀족 딸인 강씨(신덕왕후)와 1370년경에 혼인하면서, 첫째 부인이었던 한씨는 향처(鄕妻)로 전락하게 되었다. 조강지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아비 사랑을 받지 못한 비련의 여인이었다.


한씨는 속병이 악화돼 조선 왕조가 개창되기 1년 전인 1391년에 사망한다. 신의왕후는 조선 최초의 국모로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 소생 정종과 태종이 조선왕조 계보를 이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레 그녀 또한 왕후 위치로서 추존을 받게 된다.




정릉(貞陵)은 조선 제 1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묘이다. 신덕왕후는 태조 의성계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의 국모였다. 이성계는 사랑하는 신덕왕후와 사후에도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왕후의 우측에 자신이 미리 묻힐 자리 마련하여 ‘정릉’이라고 명명하였으나, 그것이 오히려 이방원에게 반감을 주었다.


결국 태조는 건원릉에, 신덕왕후는 정릉에 각각 따로 모셔진 배경이 되었다. 만약 신덕왕후 강씨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지 않고 건재했더라면 권력의 향배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의왕후 강씨를 중심으로 했던 신진사대부들의 약세 또한 막았을 것이고, 감히 살아있는 권력 이성계에게 정면 도전하려던 역심(逆心 : 정치 쿠데타) 역시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로 흥한 자, 칼을 고집하면, 칼로 망하리라.”란 말처럼 조선을 세우는데 한 축 담당했던 이방원 칼날에 의해 즉, 이방원의 역(逆)쿠데타를 실현시켜 주는 구실이 된 것이다.


그녀는 천수 누리지 못한 채, 태조 5년 8월에 이득분 사저에서 승하하였다. 죽은 권력은 살아 있는 권력을 이길 수 없듯이 태조 이성계가 승하하자, 태종은 정릉이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하여 아예 정릉을 도성 동북쪽 산기슭 즉, 지금 정릉동에 천장한다. 신덕왕후 강씨를 태조의 후궁으로 폐위시켰다. 260여년 후 현종 10년, 우암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신덕왕후로 다시 복위되고, 정릉의 능 상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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