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 라면스프처럼 는개 날린다
오늘도 남춘천 단칸셋방 광호형네 집 처마 밑에 라면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를 때처럼 가난 끝 은빛 희망이 터지곤 한다 형 혼자 사는 서너평 남짓 방안엔 신주단지 모시듯 흑백 테레비와 커피세트가 자릴 차지하였고 더욱이 손때 묻은 시집들이 사각 앵글 속에 꽃혀 반짝거렸다 잠자리를 방해할 만큼 온갖 서적들이 방의 절반 차지해도 형은 그것들이 유일한 재산이라며 오히려 대여해준 무협지 시리즈를 내놓으라고 난리 친다 잠시 후 형의 너털웃음이 가스버너 코펠 속 라면처럼 끓어오르고 쫄깃쫄깃한 면발의 밤이 익어갔다 방금 치다 만 수동타자기엔 형의 온기가 따스이 남아 출렁인다 시 많이 썼냐는 물음에 요즘은 시를 쓰질 못했다는 형의 넉살에 속아주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 테잎을 틀어주며 불쑥 내미는 커피잔 속엔 바람과 별과 시가 출렁거렸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형을 찾아와 진드기처럼 물고 늘어진다하여 내 이름을 ‘진드기’라고 부른 광호형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를 라면스프 뿌리듯 내게 늘어 놓는다 비가 하얗게 내리는 남춘천에 물방울들이 끓고 있었다
가슴을 활짝 열어놓은 연탄 구멍처럼…
- 정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