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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묘(燕山君墓)

by 정유지

연산군묘(燕山君墓)

출처 : 조선왕릉 전문사진작가 김상일

큰 아들 노릇하니 인생도 탄탄대로

모친이 폐비 윤씨 저 홀로 자란 왕자

베풀 줄 모르는 성품

바람 앞의 등잔불

1498 무오사화 1504 갑자사화

정적 제거 작업 최악의 자충수라

문신들 처형한 성정

소통 창구 없앴지

사대부 무시 행보 거듭된 패륜 행동

혁명적 중종반정 권좌를 날린 임금

조선조 대표적 폭군

이름표만 남겼다


-정유지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 77에 있는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왕 연산군(1494~1506 재위)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쌍묘로 되어 있다. 사적 제 362호로 관리되고 있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에는 등재되지 못하였다. 현재는 정릉관리소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관리하고 있다.


연산군 묘는 대군의 예로 조성하였으며 그에 따라 홍살문이나 정자각은 없다. 연산군은 일명 쫓겨난 임금이고 조선역사에 2번의 반정 있는데 그 반정으로 권좌에서 내려온 그 첫 대상자가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어머니 윤씨는 연산군이 3살 때 폐출되어 그 이듬해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1494년 19세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성종대 사림의 등장으로 수세 몰린 훈구파의 정치적 공작과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게 되면서 형성된 성격상의 문제가 겹쳐 1498년 무오사화, 1504년 갑자사화 등 2차례에 걸쳐 대규모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 비롯해 문신들을 대거 처형, 언관(言官) 제도를 크게 축소했으며, 당시 사대부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왕좌에서 물러났다.




왕위에서 물러난 그해, 귀양지 교동도(강화도 옆의 섬)에서 병을 얻어 사망하였다. 그는 왕위에 쫓겨나면서 왕에 오르기 전 호칭이었던 '연산군’으로 강등되었다. 따라서 그의 무덤은 왕과 왕비를 위한 '능'이 아닌, 일반 왕족을 위한 '묘'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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