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272의 홍릉은 조선 26대 왕(1852~1919, 재위: 1863~1907)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 고종과 비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한 능이다.
홍릉은 제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씨를 하나의 봉분에 함께 모신 합장릉으로 조선왕릉 전통 양식 아닌 황제릉으로서 정자각 대신 침전을 배치하고 있다.
1895년8월20일 경복궁(곤녕전)에서 시해된 명성황후는 1897년 11월21일 서울 청량리에 묻혔고 고종은 1919년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숨져 3월4일 현위치에 예장되었고 그때 명성황후의 능이 풍수지리상 불길하다 해서 이장되어 고종 능에 합장됐다.
고종의 자는 성림(聖臨)이고, 호는 주연(珠淵)이며, 영조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했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세도 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 따른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의 치적이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해 국권회복을 기도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의 칭호 받고 덕수궁서 말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고종이 명성황후, 흥선대원군과협치해서30만 강군을 양성했더라면 대한제국은 다른 융성의 길로 갈 수 있었듯이, 군대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만드는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