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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빛물결 Nov 23. 2024

연필과 펜

빼앗긴 연필과 쥐어진 펜의 의미

상무님이 업무 설명을 위해 내 자리로 오셨다. 


'이거로 쓰세요' 내가 샤프를 건넸다. 

'요즘 샤프를 쓰는 사람도 있네.' 상무님이 샤프를 받는다. 


생각해 보니, 샤프나 연필을 언젠가부터 쓰지 않는다. 내가 그날 샤프를 쓰게 된 것도, 찾던 펜은 회사 비품실에 남아있지 않았고, 샤프만 수북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때는 선생님이 펜을 쓰지 못하게 했다. 손이 글씨를 쓰는 힘을 기르려면 매끈하게 굴러가는 펜볼보다는 비교적 뻑뻑한 연필심이 낫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필로 적은 글은 지울 수 있다. 지우개로 슥슥 문지르고 손날로 탁탁 지우개 똥을 공책 밖으로 밀어내면 되는 일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펜으로 공책에 무언가를 적는다는 것은 작은 일탈이었다. 펜으로 쓰면 지울 수 없다는 사실에 펜을 들고 무언가를 적어 내려갈 때면, 은근한 긴장 상태였다. 때문에 어른들이 펜으로 거침없이 무언가를 휙휙  써 내려가는 모습은 제법 멋져 보였다.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찬 모습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실수를 하지 않기에 어른에게 펜이 쥐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수를 지울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연필과 지우개를 뺏긴 채로 하는 한 번 밖에 불러주지 않는 받아쓰기. 그것이 어른의 일상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알겠지? 이런 내용들을 담아서 슬라이드 두 장 그려주면 될 것 같아. 오늘 EOD까지.'

나는 이제 샤프심으로 쓰여진 이 업무를 펜처럼 해내야 한다. 


그러다 문득,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펜으로 쓰는 연습을 하는 어떤 수업시간이 떠올랐다. 

띄어쓰기가 틀렸을 때, 어순이 이상할 때, 단어 선택이 어색할 때, 약속된 기호를 사용해 지우지 않고도 수정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실수의 흔적은 남는다. 펜으로 덧칠할수록 더 선명해진다. 그래도 실수를 바로잡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한다'라는 보편타당한 명제를 매일 실천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펜으로 적은 실수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사실이 조금의 위로가 되어 야근 내내 사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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