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or someone like you
향수가 다 떨어졌다.
'Ghost in shell (공각기동대)' 혹은 '껍데기에 갇힌 영혼' 쯤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이 되고 싶었던 사이보그의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사람의 살 냄새를 재연해 냈다는 조향사의 설명에 홀딱 반해 3년째 꾸준히 쓰고 있는 향수다.
이 향수가 떨어진 지 꽤 되었음에도 선뜻 향수를 사러 가지 못 한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내 미루는 습관과 무거운 엉덩이 때문이지 뭐.
두 번째는 이 보다 더 한 핑계다. 이 향수를 항상 같이 사러 가던 그 애가 이제는 없기 때문이다. (죽은 거 아니고 헤어진 거다.) 심지어 이 향수는 '니치 향수 브랜드'라는 이유로 판교 현대백화점에 밖에 입점해 있지 않은데, 판교는 그 애와의 기억 밖에 없는 동네다. 내가 어떤 장소에 가서 누군가와의 시간은 곱씹는 '그런 사람'이었나. 그런 사람일까 두려워 가지 못했다는 핑계를 생각해 낸다.
그런데 마침 수원에서 보고를 하게 되었다. 서울 서쪽에 사는 나에게 수원까지 간 거면 판교는 거의 다 간 거다. 심지어 전무님이 차로 친히 데려다주신 단다. 게다가 생일 때 받은, 마땅히 쓸 일이 없는 백화점 상품권도 떠올랐다. 핑계가 고갈됐다!
제안서 업무로 꼬박 밤을 새우셨다는 파트너님의 졸음운전 때문에 향수고 나발이고 향부터 피우게 될 것 같아 쉴 새 없이 말을 붙이다 보니, 벌써 다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동네.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와의 시간을 곱씹는 사람이 될 것만 같은 나쁜 예감이 든다.
"먼 길까지 태워다 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전무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백화점 안으로 들어간다. 생각보다 빠르게 내가 '그런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평소 보다 더 빨리 걷기로 한다. 오직 향수 매장을 찾는 데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지독한 길치인 나는 1층 구석구석을 두 번이나 돌아다녀야 했고, 덕분의 별의별 기억들이 다 끄집어내졌다.
드디어 찾은 매장은 위치가 달라져 있었고, 조향사도 다른 사람이었다. 여기서 위로를 얻어야 할까. 안도도 잠시, Ghost in shell 오프라인 재고가 없단다. 이제는 온라인 판매도 하는 모양이다. 이걸 알았더라면, 여길 오는 일도 없었을 텐데... 그렇게 허탈해하는 순간, 다시 한번 내가 '그런 사람'임이 증명된다.
"그럼 같은 브랜드, 비슷한 계열의 향수를 시향해 봐도 될까요?"
이왕 왔으니, 30ml 짜리라도 사서 가기로 한다. 여름이니까 시원한 향으로 구매했다. 마치 밀린 여름방학 숙제를 다 끝낸 개학 전 날 밤과 같은 안도감이 든다. 드디어 3년 간의 향에서도, 3년 간의 기억에서도 잠깐의 해방인 것이다.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그 애가 떠오를 만한 노래들을 스킵하며 시간을 때운다. 아무리 시간을 때우고 기워봐도 긴 주행시간이 지루해진 나는 향수를 박스에서 꺼냈다.
'You or someone like you'
눈이 좋지 않아서, 글을 대강 읽는 습관이 있어서, 빨리 그 동네를 뜨고 싶었어서, 향수의 이름을 이제야 봤다. 이제 막 꾸역꾸역 서울로 진입하려던 참이었는데, 예상치 못 했던 향수의 이름에 헛웃음이 나온다.
고맙게도 친구들과 직장 동료들이 내가 FA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에 몇 번의 소개팅을 주선해 줬다. 'You' 에게로 돌아가는 감정적인 선택을 할 리 만무한 나는 그 애와 헤어진 뒤, 줄곧 상대가 'Someone like you' 이길 기대 하며 소개팅에 나갔다. 서너 번의 소개팅이 남긴 거라곤 한 사람을 이루는 수많은 변수들을 곱한 결괏값이 어떤 사람과 완전히 같을 수 없고, 비슷하기도 어렵다는 사실과 좋은 식당 몇 곳뿐이었다.
그 애를 이루는 수많은 변수들 사이를 굴러다니던 생각이 우리의 이별을 이루었던 변수들로 옮겨 붙는다. 우리가 조금 더 늦게 만났더라면, 그 애가 조금 더 감정적인 사람이었다면, 내가 커리어 욕심이 덜 한 사람이었다면. 하지만 25살의 무모함이, 그 애의 고요한 냉정함이, 나의 열정적인 호기심이 서로를 서로의 삶 속으로 끌여당 겼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가 우리였기 때문에 서로를 만난 것처럼, 우리가 우리였기 때문에 헤어졌다. 어쩌면 이번 생에 우리 인연의 끝은 이별이 필연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런 맥락에서 You or someone like you는 You or no one else를 은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여름을 기점으로 더 이상 소개팅을 하지 않게 된 나는 향수 한 통이 다 비워져 가도록 생각한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이별이 필연이 아닌 인연일까, 필연처럼 올 이별 따위 눈 감아버릴 수 있는 인연인 것일까. 아직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향수의 향기 같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