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떠들어보는 독후감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은 후에

by 춘즐

친구들이 1Q84를 돌려 읽을 때 나는 혼자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소설을 독파하던 학생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은 알아도 정작 소설은 관심 없었던. 지금도 그의 소설은 잘 읽지 않지만 에세이는 꽤 좋아한다. 유유히 흘러가는 일상에서 잡아낸 유머를 작가만의 칼로 연필 깎듯 다듬어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에 읽은 책은 문학동네에서 펼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1983)와 <랑게르한스섬의 오후>(1986)을 한 권으로 묶은 책이다. 조그만 책방에서 샛노란 표지를 뽐내며 어서 날 사라고 부르길래 고민 없이 데려왔다.

책의 맛을 극대화하려면 신선도를 지켜야 하니까. (되도록 인터넷 배송은 신선도가 중요하지 않은 책들만 사용하는 편이다.)


이 작가의 에세이를 읽을 때면 이 작가가 듣고 먹고 사용한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단순히 내가 팔랑귀를 가진 따라쟁이여서 일 수도 있고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불가항력적인 힘일 수도 있다.


그런고로 안자이 미즈마루의 일러스트가 글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책에서 고작 81p까지 읽는 동안 반토막도 안 나온 그림의 제품은 미국 Planters 사의 땅콩이라는 것을 찾았고 그 옆에 있는 펜은 그 회사의 마스코트인 Mr.Peanut가 달린 펜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작가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 세일러 사의 만년필을 사용했다는 것도 확인했으며 덕분에 선반으로 직접 나무를 깎아 만년필을 만들 수 있는 원데이 클래스를 수강할 곳도 찾았고 반대로 그런 '만년필 키트'는 가성비가 매우, 좋지 않아 그 돈으로 기성품을 사는 게 낫다는 얘기도 보았다.

그리고 나카야라는 사용자 전용 '맞춤 만년필'이 있다는 것도... 어째 필기구에만 국한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올바르게 느끼셨습니다.


다행히 Mr.Peanut 펜은 못생겨서 소장욕구가 생기지는 않았다. 대신 나카야 만년필은 여건이 된다면 꼭 구매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책 속 '만년필'이라는 짧은 글에서 가게 주인은 손가락의 길이와 굵기, 피부의 기름기, 손톱의 딱딱함부터 시작해 손의 흉터와 척추뼈까지 확인하며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말이에요, 척추뼈 하나하나로 사물을 생각하고, 글자를 쓰는 법이에요."

"그래서 나는 그 사람의 척추뼈에 딱 맞는 만년필만 만드는 겁니다."


이런 곳이 실존하면 얼마나 좋을까.

더 나이 들기 전에 여기서 만년필 한 자루 맞췄으면. 내 척추뼈는 사춘기 중학생보다 삐뚤어서 곧 있으면 좋은 만년필이 생겨도 오래 앉아서 쓰지 못할 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 이후에도 따라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자꾸 보여 아예 리스트를 만들었다.


20p. 커티삭 위스키 마셔보기

56p. 비치 보이스의 <Fun, Fun, Fun> 듣기

79p. 로스 맥도널드 책 읽기


LP로 재즈를 들으며 한 손에는 위스키 다른 손에는 만년필을 들고 끄적이는 나. 잉크는 파커의 quink 로열 블루로. 제법 있어 보이는 상상이다.

물론 실제 무라카미 씨는 상상과는 많이 달랐겠지만 어쨌든 상상이잖아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짝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작업 방식도 그렇지만 인간적으로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한데 글에 수록된 작가들끼리의 대화에서 직감이 왔기 때문이다.

이 사람도 만만찮은...라고.


그래서 오늘은 동네 도서관에서 <안자이 미즈마루_마음을 다해 대충 그린 그림>을 빌려왔다.

과연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덧붙여 이 책에는 큰 단점 하나가 있다.

일러스트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모든 그림의 중간 부분이 제본 때문에 말려들어가 아무리 펼쳐도 온전히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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