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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Oct 25. 2023

저서 소개

박인성의 중국현대사

집필 동기는 펑더화이(彭德怀)

『박인성의 중국현대사』, 이 책의 집필 동기는 펑더화이(彭德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필자가 저장대학 근무 시절에 자주 가던 항저우 시내의 중고서점 서가에서 『펑더화이 자술(彭德怀自述)』이란 책을 뽑아 들고, “왜 ‘자술(自述)’이라 했을까?” 호기심에 책장을 넘겨보던 그 순간 그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책은 펑더화이가 ‘문혁’ 발발 후에 한편으로는 홍위병들에 의해 공개 비판대회에 끌려 나가 학대와 폭행을 당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짜 맞추기 의도를 갖고 심문을 진행한 전담 조사조의 핍박과 강압적 요구에 따라 백지 위에 수차례 진술 기록한 내용을, 펑더화이가 베이징의 군병원에서 한을 품고 죽은 후에 마오쩌동도 죽고 ‘문혁’이 끝난 후에 펑의 당적과 명예가 회복된 후에 출간된 책이었다. 따라서 (대부분 전기류 책의 내용과는 달리) 그 내용에 미화나 과장 같은 게 없을 것이니 중공의 역사와 상황을 올바로 파악, 이해하기 위한 매우 좋은 자료이다. 그날 이후 10여년간 틈틈이 펑더화이와 관련된 문헌자료들을 수집, 정리하기 시작했고, 올해 5월 하순에 출간되었다.


역사 기록은 끝까지 살아남은 승자의 입장과 관점에서 기록된다. 더구나, 학문과 예술활동 영역에 까지도 “혁명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중공의 통제 및 검열체제하에서 제작 유통되고 있는 중국 현지 자료들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집필과정 내내 마오쩌동과 소위 “문화대혁명”에 대해 객관적으로 냉철하게 분석, 평가, 정리하고자 했다.


주요 관점과 내용

이 책에서 제시한 주요 관점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은 소련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지도와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소련파가 당중앙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창당 초기에는 도시노동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혁명전략을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1927년 9월, 마오쩌동이 후난성 창샤 점령을 시도했던 추수봉기 실패 후 패잔병 무리를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가서, 산간 오지 농촌에 무장혁명 근거지를 구축하고, 토비의 싸움법을 기초로 한 유격전술에 군중노선과 토지혁명전쟁을 결합하여 결국 승리했다. 관건 요인과 동력은 농촌 인구 중 대다수를 점하는 고농(雇農)과 빈농의 지지를 견인해 낸 토지 무상몰수 및 무상분배 선동과 책략이었다.


둘째, 중공이 토지를 미끼로 농민들을 선동, 동원한 것은 결코 농민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역대 왕조말기에 농민봉기 주동세력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내 건 선동 구호가 ‘경자유전’과 ‘부채 탕감’이었다. 기실 중공의 토지책략이란 것도 결국엔 군중동원과 발동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효과를 최우선으로 한 것이었다. 또한,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자신들부터 그 ‘사회주의’라는 게 뭔지 제대로 알고 그렇게 떠벌였을까? 나는 그들 대부분이 그 ‘사회주의’라는 것이 뭔지 제대로 이해도 못한 상태에서 선동용 청사진 구호용으로만 떠벌이며 이용했을 뿐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소위 “사회주의 신중국”의 농민들은 무상분배받은 토지의 소유권(사유권)을 그 등기 대장의 잉크 냄새와 온기가 채 식기도 전에 다시 국가권력에 ‘무상몰수’ 당했고, 그 다음에는 “사회주의 개조” 운동과 합작화와, 인민공사 건설 등 연이은 “운동”의 파도 속에서 매일 호각 소리에 맞춰서 집합하고 집단 노동한 후 매일 매 끼니를 공동식당에서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함께 먹어야 하는 일상을 살아야 했다. 중공은 이를 “공산주의 천국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렇게 정해진 시간에 집합, 해산하며 종일 노동하고 받는 대가가 고작 공동식당에서 밥 먹여 주는 걸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보리고개 등 굶주림이 일상화 되었던 그런 시기였으니까 그런 말과 선전이 통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체주의 집단 생산으로 인한 농민들의 생산 적극성 결여로 생산량이 급감하면서 대기근 상황이 초래되자 그 공동식당에서 농민들에게 밥을 보장해 줄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지름길로 공산주의로 가기 위해서라면서, 또 각 가정 단위로 밥 해 먹는 건 자본주의 방삭이고 반혁명이라면서 각 가정의 솥단지와 남비, 밥그릇까지 모두 압수해 가고 아궁이는 폐쇄해 논 상태에서 천국 입구에 있다는 공동식당에서 밥이 제공 안되니 농민 주민들은 굶주리며 앉은 채로 또는 누운 채로 부종병에 걸리고 그렇게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다.


셋째, 혁명 승리후, 특히 중공 정권 출범 후 8개월여만에 발생한 한국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더욱 기고만장하고 오만해진 마오는 ‘대약진’구호를 내걸고 좌경 모험주의 농촌사회주의 운동을 거칠고 조급하게 추진했으나 그 결과는 대실패 대파탄이었다. 적게 추산해도 3000만명 이상의 농민들이 기아 상태에서 굶어 죽었다. 봉건왕조 시절이라 해도 이 정도라면 대재난이었다. 이 시기에는 중공 내부에서도 “이러려고 우리가 지주와 부농들을 그렇게까지 모질고 잔인하게 학대하고 죽였단 말인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이같은 정황들도 결국 중공‘토지’도 ‘사회주의’도 모두, 그것을 군중 동원을 위한 선동 수단으로 사용했을뿐이라는 것을 설명해 준다.


넷째, 마오는 자신의 권위와 권력기반이 불안해진 이 같은 국면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이라 명명한 음모를 기획, 발동, 연출했고, 그 결과 문화와 혁명 모두를 능멸하고 당을 사당화(私黨化) 했다.


다섯째, 마오가 1959년 장시성 루산(廬山)에서 펑더화이(彭德怀)를 숙청한 것은 ‘문혁’ 발동을 위한 사전공작이었다. 마오는 펑더화이 숙청 후, 인민해방군의 지휘권을 린뱌오(林彪)에게 넘기고, 학생과 노동자들을 선동, 발동시켜서 자신의 독재체제 구축에 장애가 될 인물들을 차례대로 숙청·제거했다.


여섯째, 마오가 ‘대약진운동’을 시작하면서 폐기된 ‘신민주주의 단계’가 개혁개방 이후 덩샤오핑과 후야오방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주의 개혁파에 의해서 ‘사회주의 초급 단계’, ‘중국식 시장경제’ 등의 명칭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마지막으로, 중공의 경험을 통해서 되새겨야 할 점은 ‘좌’의 문제이다. 즉, ‘좌’는 폐쇄적 확증편향 회로 속에서 추상화, 구호화된 청사진과 실천 층차간에 차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맹동적으로 추진하면서 결국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고 탄압하는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이 ‘우’보다도 더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궁극적 선’이나 ‘역사적 사명’ 따위를 추구한다고 떠벌이면서, 폐쇄적 확증편향 신념 틀과 궤도 속에서 지시와 명령을 하위 층차에 수직적으로 하달하므로, 아래로 기층단위로 갈수록 그 위험과 폐단이 계속 더욱 커지고 깊어지게 된다. 이는 1959년 여름, 장시성 루산에서 펑더화이도 지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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