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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Mar 21. 2024

근대 이전 중국 토지사유제 확립

중국부동산공부(13)-토지사유제 확립(3)

춘추전국 시기 말기부터 국유토지가 사유화되기 시작했으나, 그때까지는 토지사유제가 제도로 확립되지는 않았다. 

진(秦) 효공(孝公) 상앙(商鞅) 변법에 의해 정전제가 폐지되고 사유토지가 합법화된 후에, 개인이 정부가 인정한 토지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부터 사유토지가 가장 중요한 토지재산권이 되었다. 

비록 각 조 각 대에 각종 형식의 국유토지가 있었지만, 수량상 사유토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컸다. 단,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균전법이 실시된 약 300년의 기간(485~780)에는 국유제 부활과 사유토지에 대한 제한과 통제가 다시 강화되었고, 당 중엽에 이르러 균전제가 철폐되고 난 후에는 다시 토지사유제가 회복되었다. 

이와 같이 토지 사유와 토지매매, 그리고 토지겸병이 출현하고 제도화되면서, 토지소유에 대한 관념도 종전의 토지 국유 위주의 일원적 관념에서 국유와 사유 관념이 병존하는 이원적 관념으로 변했고, 갈수록 사유제의 비중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근대 이전 중국 토지사유제의 확립

중국에 봉건토지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때는 2000년 전인 전국시대부터였으며, 그 후 한조(汉朝) 이후 주도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진·한 이후 중국 봉건사회에는 3가지 기본적인 토지소유제 형식이 존재했다. 즉, 봉건국가토지소유제, 봉건지주토지소유제와 자경농의 소토지소유제이다. 그중에서 봉건지주토지소유제는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봉건토지관계 발전을 제약했던 토지소유제 형식이다. 


진에서 서한까지는 토지 사유를 전제로 하는 지주제 경제가 초보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며, 동한에서 남북조까지는 역전 및 후퇴하는 단계였다. 수·당 시기까지는 지주제 경제가 다시 기형적인 상태를 벗어나 정상적인 발전 궤도에 들어섰다. 

송대에는 지속적인 경제발전 추세가 유지됐고, 지주제 경제가 고도로 발전했다. 명·청 시대는 토지사유제와 지주제 경제의 제2의 고도 발전기이다. 

이 같이 중국의 지주제 경제는 고도 발전과 곡절, 역전이 되풀이 되는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왔다. 

지주소유제는 주로 토지재산권과 봉건적 종속관계로 구성되었다. 양자의 변화와 발전, 특히 봉건적 종속 관계의 변화와 발전에 의해 봉건시대의 특징과 사회경제 발전의 단계성 및 그 추세가 돌출되었다.


중국 봉건사회의 토지사용제도는 다시 세 가지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국가 소유의 토지와 일부 지주 소유의 토지를 경작 능력이 있는 농민에게 경작하도록 임대해주는 형식,

둘째, 지주가 농민을 고용해 경작하고 농민은 토지소유자(주로 지주)의 고용인이 되는 형식, 

셋째, 농민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형식이다. 


중국 봉건사회에서는 절대다수의 토지가 봉건지주의 소유이기 때문에 지주가 농민을 고용해 경작하는 방법이 토지사용제도의 주요 형식이 되었다. 동시에 전체 봉건사회의 토지경제 관계는 지주가 토지를 임대해 지대(地代)를 얻고, 농민이 지주의 토지를 임차해 지대를 납부하는 관계, 즉 토지의 임대와 임차, 지대 징수와 지대 납부의 관계이다. 

지대의 종류와 형식은 시기에 따라 각각 달랐다. 중국의 지주경제제(地主经济制)는 지대 형태가 발전·변화해 실물 분성임대(分成租)에서 실물 정액임대(定额租)로 옮겨가고, 다시 실물 정액임대에서 화폐임대로 옮겨갔다.


한편, 양송 이후 명·청 시기까지 형성 및 발전해온 농지시장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张曙光, 2011: 8; 邓大才, 2010: 27~28).

첫째, 토지사유제가 확립되었다. 양송 시기에 이미 “농지제도를 세우지 않고(不立田制)”, “토지겸병을 억제하지 않는다(不抑兼倂)”는 정책을 채택했는바, 이는 이전의 각 왕조와 같이 ‘정전’, ‘점전’, ‘균전’, ‘둔전’ 류의 사상을 제도화하지 않고, 토지겸병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토지 사유를 승인하겠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토지소유권의 유전(流转)을 장려하겠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토지사유권 확립의 가장 유력한 증거는 토지등기제도이다. 예를 들면, 앞에서 설명한 명대의 ‘어린책(鱼鳞册)’과 ‘황책(黄册)’이 있다.

둘째, 국유토지인 관전(官田)의 시장진입이다. 양송 이후에도 각 왕조는 토지매매를 용인했지만, 관전의 거래는 엄격히 금지했다. 

그러나 사유토지의 거래가 갈수록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빈번해지면서, 국유토지도 시장에 진입했다. 즉, 송대의 관전, 학전, 명대의 관장(官庄)과 둔전, 청대의 기전(旗田)이 모두 매매 금지령을 돌파하고 토지시장에 진입했다.


셋째, 거래 규칙이 형성되고, 거래 절차가 규범화되었다. 거래 규칙은 정식 규칙과 습관법과 같은 비정식 규칙으로 구분되고, 매입 및 매도자 탐색, 거래 중재, 계약서 날인 등 토지거래 절차도 규범화되었다. 


넷째, 지권(地权)이 분화되고 거래가 다양화되었다. 양송 이전 시기에는 주로 토지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유전(流轉)되면서 각각의 시장이 형성되었고, 거래 형식도 비교적 간단했으나, 그 후에 토지재산권(地权)이 토지사용권(田面权) 또는 용익물권(用益物权)인 전피권(田皮权)과 소유권인 전저권(田底权, 또는 田骨权)으로 분화 및 다원화되었다. 

청조 중·후기와 민국 초기에 농촌토지는 소유권과 사용권이 합일(合一)된 청전(淸田), 소유권은 보유하나 사용권은 없는 민전(民田), 점유권과 경작권은 있으나 소유권은 보유하지 않는 객전(客田) 등으로 세분되었고, 민전을 “대피전(大皮田)”, 객전을 “소피전(小皮田)”이라고도 불렀다.

이 세 종류의 토지재산권은 자유 거래를 통해서 유전(流转)되었다. 민전(民田)을 사고 팔 때는 객전의 권익인 경작권(소작권)을 침해할 수 없었다. 가격은 일반적으로 청전이 가장 높았고, 객전이 가장 낮았다. 


이 같은 토지재산권의 분화에 따라, 소위 “일전이주(一田二主)” 또는 “일전삼주(一田叁主)”, 또는 단일 필지를 다수의 주주(股东)가 공동 점유하는 형식도 출현했다. 


또한, 토지의 거래 대상 및 유전(流转) 형식도 전세(押组), 소작권의 매매 또는 보증금 인상 소작료 인하(加押减租), 그리고 토지소유권(田底权 또는 田骨权)의 절대 매도(絶卖)와 매도 조건부 저당(典卖, 活卖) 등으로 다원화되었다.     



출처: 박인성외, 2018. 중국의 토지정책과 북한, 한울, 46-49


#토지제도 #토지사유제 #토지소유제 #농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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