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성 Nov 24. 2023

3대전투 발동-중공 승리

중국현대사(18)


일본이 패망, 패퇴하고 난 후 시작된 제2차 국공내전(중공측은 '해방전쟁'이라 부름)에서 중공은 자신의 무력 역량인 군대의 조직과 편제, 명칭을 국공통합 편제였던 '국민혁명군' 소속 '팔로군'과 '신사군'에서 '인민해방군'으로 개편하고 국민당군에 대한 전쟁 전략도 유격전 위주 전술에서 전면적 선제 공격 전략으로 바꾸고 3개 지구로 나누어서 순차적으로 연이어 국민당군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발동했다. 이것을 ‘3대 전투(三大战役)’, 즉, 랴오닝·션양(辽沈) 전투, 화이하이(淮海) 전투, 베이핑·톈진(平津) 전투이다.  

이 '3대  전투'는 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까지 5개월간 진행되었고, 이들 전투가 모두 중공의 승리로 끝나면서 국민당군 주력은 대부분 괴멸되고 장강 이북 전 지역을 중공이 장악했다.

'3대 전투' 승리후, 인민해방군은 국민당군의 저항조차 없는 상태에서 장강을 건너서 국민당정부의 수도인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이어서 상하이, 항저우(杭州), 허페이(合肥), 우한(武漢), 창샤(长沙) 등 장강 이남 주요 도시들을 점령, 접수하고 전국 대부분 지구를 장악하게 된다. 이하에서는 이 ‘3대 전투’의 개요와 진행과정을 요약했다.


랴오닝·션양 전투


중공중앙 최후의 농촌 소재지 허베이성 시바이포 전경

중공중앙은 1948년 9월, 당시 중공중앙의 최후의 농촌 소재지였던 허베이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개최된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민당군에 대한 공격전쟁 발동을 결정하고, 이 전쟁의 시작을 형세가 유리한 동북 지구에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중공측은 이를 "전략적 결전"이라 부른다.

이 결정 직후, 9월 12일에 린뱌오(林彪)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이 랴오닝성 이현(義縣)에서 허베이성 롼현(灤縣)까지 약 300㎞ 전선에서 국민당군을 향한 진격을 시작했다.


당시 중국 동북부 만주(滿洲) 지구는 전체 중국 대륙을 통틀어 군사력 면에서 인민해방군이 국민당 군대를 능가하고 있던 유일한 지구이고 중국 내 최고의 중공업 발달 지역이면서 동시에 최대 식량 생산 지구였다.

또한 1948년 9월 9일,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갓 출범한 북조선 김일성 정권의 후방 지원도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소위 '3대 전투'의 시작을 만주지구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한 주요 요인이었다.



1948년 10월 1일에 린뱌오가 지휘하는 중공 동북야전군이 베이징과 션양(沈陽) 간을 연결하는 베이닝(北寧) 철도를 절단하고 장춘, 션양에서 산하이 관내(山海關内)로 통하는 육상교통을 단절하고 진저우(錦州)를 고립시켰다.

따라서 국민당군은 모든 보급을 항공 운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심각한 물자 부족 상황에 빠졌다.

당시 국민당은 만주지구에 4개 병단(兵團), 14개 군, 44개 사단 그리고 여단과 지방 보안단대 합해서 약 55만 명의 병력을 션양, 장춘, 진저우 3개 지구에 분산 배치하고 있었다.

장제스(蒋介石)는 진저우(錦州)의 위험 상황을 풀기 위해 진저우 서쪽의 후루다오(葫蘆島)와 동쪽의 션양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에게 동시에 마주 보고 진저우로 진격하며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랴오닝-션양 전투 총지휘 린뱌오(가운데)

중공 측 동북야전군은 1948년 10월 14일에 진저우로 총공격을 시작했고 31시간의 격전을 거친 후 국민당군 수비군 10만여 명을 섬멸하고 하루만인 10월 15일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이로써 동북 지구 내에 분산 주둔하고 있는 국민당군의 육상 퇴각로를 완전하게 봉쇄했다.

진저우 점령 후 10월 17일에는 장춘 주둔 국민당군 제60군 군단장 청저셩(曾澤生)이 2만 6000여 명 부대원을 거느리고 투항했다. 이로써, 10월 21일에는 중공 동북야전군이 장춘지구에 진입 점령했다.


1948년 10월 18일, 장제스가 션양(沈阳)으로 와서 총퇴각 작전을 짜고 서진(西进) 병단에게 계속 전진하여 동진(东进) 병단과 협력하여 다시 진저우를 탈환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린뱌오(林彪)의 동북야전군 지휘부는 적을 깊이 유인한 후, 랴오닝 서부(遼西) 약 120km2 지구에서 국민당군 총 10만여 명을 대규모 포위공격으로 섬멸했다. 이 중 국민당군 5대 주력에 속하는 신1군(新1軍)과 신6군이 포함되어 있었고, 국민당군 사령관 랴오야오샹(廖耀湘) 중장은 포로가 되었다.


동북야전군의 공격 개시, 랴오닝-션양 전투

동북야전군은 승세를 타고 그 다음 날(10월 29일)부터 동쪽으로 전진하면서, 신민(新民), 푸순(撫順), 랴오양(遼陽), 안산(鞍山), 하이청(海城) 등 션양 외곽 거점도시들을 점령했다. 이어서 1948년 11월 2일에는 만주지구 최대의 중공업 도시인 션양의 수비군 13만여 명을 섬멸했다. 이와 동시에 같은 날, 잉커우(營口)도 점령하면서 랴오닝·션양 전투가 끝났고, 만주지구 전체를 중공이 점령, 장악하였다.

한편, 진시(錦西), 후루다오 지구에서 버티던 국민당군은 11월 9일, 발해만 해상을 통해서 산해관 서쪽 관내로 후퇴했다.

52일간 진행된 랴오닝·션양 전투에서 동북야전군은 국민당군 총 47만 2000여 명을 섬멸했고 소장 이상 군관 186명을 생포했다. 동북야전군 측 사상자는 6만 9000여 명이었다.


랴오닝·션양(辽沈) 전투 승리 이후 인민해방군은 포로와 점령 지역에서의 장정 보충 등을 통해서 병력 수에서 최초로 국민당 군대를 추월했고, 이 같은 중공의 병력 우세는 계속 가속화 되었다.  

이후 만주지구는 중공측의 견고한 전략 후방이 되어서 연이어 진행된 화이하이(淮海) 전투와 베이핑·톈진(平津) 전투에서 전략적 우세를 확보하는 데에 결정적인 배후 지원 및 보급기지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에 마오쩌동은 이 같은 형세 진전에 고무되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는 국민당을 타도하는 데 대략 5년여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예상했었으나 현재로서는 1년 정도면 될 것 같다.”


화이하이 전투

랴오닝·션양 전투에 이어서 진행된 화이하이 전투(1948.11.6~1949.1.10)의 주요 지휘관은 류보청(劉伯承), 천이(陳毅), 덩샤오핑, 쑤위(粟裕, 1907~ 1984년), 탄전린(譚震林) 등이었고, 쉬저우(徐州)를 중심으로 동쪽에서는 하이저우(海州)에서 서쪽의 상추(商丘)까지, 북쪽에서는 린청(臨城: 현재의 薛城)에서 남쪽의 화이하(淮河)까지 광대한 지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중공은 정규 야전군 66만 명과 지방 무장군 40만 명을 투입했고, 국민당군 병력은 50만여 명이었다.

진격하는 중공 야전군, 화이하이 전투

화이하이 전투의 제1단계는 1948년 11월 6일부터 22일까지 진행되었다. 이 단계에서 중공 ‘화동야전군’은 녠좡(碾庄) 지구에서 국민당군 황바이타오(黄百韜) 병단 10만여 명을 섬멸했다.


제2단계 전투는 1948년 11월 23일부터 12월 15일까지로 ‘중원야전군’과 화동야전군 일부가 쑤현(宿縣) 서남부의 솽두이지(雙堆集) 지구에서 국민당군 황웨이(黄維) 병단 11만여 명을 포위 섬멸했다.

두위밍(杜聿明)이 지휘하는 쉬저우 국민당군 3개 병단 25만여 명이 서쪽으로 포위망을 돌파할 때 중공의 화동야전군 주력이 용청(永城) 동북부의 천관좡(陳官庄) 지구에서 포위하여 그중 쑨위안량(孫元良) 병단 약 4만여 명을 섬멸했다.


제3단계 전투는 1948년 12월 15일부터 1949년 1월 10일까지로, 화동야전군이 국민당 두위밍 부대에 총공격을 시작하여 약 20여만 명을 섬멸했다.


포로가 된 국민당군, 화이하이 전투

66일간의 화이하이 전투는 ‘3대 전투’ 중 인민해방군의 희생이 가장 컸으나 섬멸한 국민당군 수도 가장 많았다. 인민해방군은 1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55만 5000여 명의 국민당 군대를 섬멸하고 장강 이북의 화동 및 중원 지구를 기본적으로 장악함으로써, 장강 이북 지구의 국민당 통치 근거지를 와해시켰다. 화이하이 전투는 그만큼 정치적 영향도 컸고 전쟁 양상도 가장 복잡했던 전투였다.


화이하이 전투시 보급품 수송 장면















베이핑·톈진 전투

핑진전투 지휘관들, 앞줄 좌로 부터 니에롱전, 뤄롱환, 린뱌오,

베이핑·톈진 전투는 중공 인민해방군이 랴오닝·션양 전투와 화이하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소위 '3대 전투' 중 최후에 진행된 전투이고, 주요 지휘관은 린뱌오, 뤄롱환(羅榮桓), 니에롱전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중공중앙 군사위원회의 “우선 양쪽 머리를 치고 후에 중간을 취한다(先打两头, 后取中间)”라는 원칙에 따라 1948년 12월 22일부터 서부전선(西綫)의 신바오안(新保安)과 장자커우(張家口)를 선제공격했고, 이어서 1949년 1월 15일, 동부전선(東綫)에서 톈진(天津) 국민당 수비군 13만여 명을 모두 섬멸하고 톈진을 점령했다.


이미 랴오닝·션양 전투와 화이하이 전투를 통해서 만주지구와 화북 지구 대부분을 점령한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의 관문 항구도시인 톈진마저 점령하자, 국민당군 베이핑 지구 사령관 푸쭤이(傅作義) 지휘하의 베이핑 주둔 국민당군 부대 25만 장병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중공은 인민해방군 90만 대군을 베이핑 성벽 인근에 배치하고, 한편으로는 국민당군을 위협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공 베이핑 지하당의 공작을 통해 베이핑 내 유력한 사회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역사·문화 고도 베이핑이 전쟁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는 여론을 조성하며 심리전을 전개했다.

결국 국민당군 사령관 푸쭤이가 중공이 제시한 평화 조건을 수락·투항했고, 1949131일에 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 무혈입성 했다. 64일간 진행된 전투에서 인민해방군 사상자는 39000명이었고, 국민당 군대는 52만여 명이 섬멸되거나 투항했다. 이로써 타이위안(太原), 따통(大同), 신샹(新鄕) 등 일부 지구를 제외한 화북 지구를 중공이 점령했다.


한편, 장제스는 패색이 짙어지는 전세를 자력으로는 뒤바꿀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49년 1월 1일, 미국에게는 원조 증액, 소련에게는 평화회담 중재를 요청했으나 아무 성과도 얻어내지 못했다.

단, 소련의 스탈린은 중공이건 국민당이건 간에 중국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아서 중공에게 장강 이남의 국민당 수도 난징(南京)을 공격하지 말라는 의견을 보냈다.

이에 마오쩌동은 스탈린이 중국을 두 개의 국가로 나누려 한다며 크게 분노했다.


결국 장제스는 국민당 총통직에서 물러났고 광시(廣西) 군벌 리종런이 후임 총통에 취임했다. 국민당이 평화협상을 제의한 것은 장강 이남 지구의 통치권만이라도 유지해 보려고 시간을 벌기 위한 것이었으나 마오쩌동은 장제스와 국민당이 숨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다음과 같은 요구 조건을 포함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제스를 포함한 모든 전쟁 범죄자 처벌

⦁1947년 국민당 헌법 및 국민당 법제 폐지

⦁모든 반동 군대의 재편성

⦁모든 관료자본 몰수

⦁토지소유제도 개혁

⦁모든 매국적 조약 폐기


'전국으로 진군 명령'

마오쩌동은 장제스의 후임으로 국민당 총통 직위에 있던 리종런으로부터 최후통첩에 대한 거부 회신을 받은 후 1949년 4월 21일에 인민해방군에게 ‘전국으로 진군 명령(向全国进军的命令)’을 내렸다. 이 명령에 따라 장강 연안 각 전략 지역에서 대기 중이던 인민해방군이 ‘장강 도하(渡河)작전’을 시작했다. ‘전국으로 진군 명령’은 중국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동, 그리고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의 명의로 인민해방군에게 하달했다.


'전국으로 진군 명령' 수기

'전국으로 진군 명령' 수기




'전국으로 진군 명령', 인민일보 보도

> 전국으로 진군 명령전문

[전국으로 진군 명령]

각 야전군 전체 지휘원 전투원 동지들, 남방 각 유격구 인민해방군 동지들:

중국공산당 대표단과 난징 국민당정부 대표단이 장시간 담판을 거쳐 잠정 합의한 국내 평화협정이 난징 국민당정부에 의해 거절되었다.

난징 국민당정부의 책임자들이 이 국내 평화협정을 거절한 것은 미 제국주의와 국민당 비적 두목 장제스의 명령 때문이다.

이는 중국 인민해방 사업의 추진을 저지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기도이다. ……

이 협정을 거절하는 것은 국민당 반동파가 그들이 일으킨 반(反)혁명 전쟁을 끝까지 해보겠다는 표시이다.

이 협정을 거절하는 것은 국민당 반동파가 금년 1월 1일 제의한 평화 담판이 인민해방군의 전진을 저지하고 반동파가 숨 돌릴 시간을 얻은 후 권토중래(卷土重來)하여 혁명 세력을 멸하려는 기도이다.

이 협정을 거절하는 것은 난징 리종런 정부가 중공의 8개 평화조건을 담판 기초로 인정한다는 말이 완전 허위임을 드러냈다.

이미 전쟁범죄의 처벌을 승인했고 민주 원칙에 의거 국민당 반동 군대 일체를 개편하고, 난징 정부 및 그 관할 각급 정부의 일체 권력과 기타 각 항 기초 조건을 접수했고, 이 같은 기초 조건을 근거로 입안했으므로 지극히 관대한 각 항 구체적 방법을 거절할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이 같은 정황하에 우리는 동지들에게 명령한다.
一. 용감하게 전진하여 감히 저항하는 중국 경내의 일체의 국민당 반동파를 단호, 철저, 깨끗하게 섬멸하고 전국 인민을 해방하고 중국 영토주권의 독립과 완정(完整)을 보위하라.
二.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전범 일체를 체포하라. 그들이 어디까지 도망가건 간에 기필코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고 법에 의거해 징벌하라. 특히 주의하여 비적 두목 장제스를 체포하라.
三. 모든 국민당 지방정부와 지방 군사 집단을 향해 국내 평화협정의 최후 수정안을 선포한다. 동지들은 전쟁 중지와 평화적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원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최후 수정안의 대의에 따라 그들과 지방성 협정을 맺을 수 있다.
四. 인민해방군이 난징을 포위한 후에 만일 난징 리종런 정부가 도망가지 않고 국내 평화협정 체결을 원한다면 우리는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다.

중국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동
중국 인민해방군 총사령 주더
1949년 4월 21일



난징 점령, 중공 승리


인민해방군, 난징 국민당 정부 점령

1949년 4월 21일, ‘장강 도하작전’을 개시한 인민해방군은 이틀 만인 4월 23일 전투 없이 국민당 수도 난징을 점령했고 다음 날(4.24)에는 산시성 타이위안(太原)을 점령했다. 이어서 1949년 5월에는 항저우, 난창, 우한, 시안, 그리고 중국 최대 도시인 상하이를 차례로 점령했다.


이 무렵부터 중공중앙이 도시로 진격하는 인민해방군에게 도시 내 시가전에서는 중화기를 사용한 폭격과 화약을 사용한 파괴를 최대한 자제하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즉, 이제는 도시를 점령한 후에 관리해야 하는 도시접관(城市接管) 이후의 문제도 고려해야 하게 된 것이었다.


중공은 대도시 공략 시에는 우선 그 도시 교외 지구를 공격하면서 시내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 병력을 교외 농촌지구로 유인해 내고, 시가지 점령 전투 시에는 포격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라고 지시했다. 예를 들면, 상하이 점령을 위한 시가지 전투를 “도자기 상점 안의 쥐새끼 때려잡기(瓷器店里打老鼠)”라 비유했다. 즉, 값비싼 도자기를 최대한 깨뜨리지 않고 쥐새끼를 때려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전략전술에 따른 전투 수행으로 인해 인민해방군 병사들의 희생이 매우 컸다. 특히 황푸강(黃浦江) 서쪽에서 상하이 시가지를 남북으로 가르는 도시하천 쑤저우하(蘇州河)를 장애물 방어진지로 삼고 기관총과 대포를 쏘아대는 국민당군의 저항으로 인한 희생이 매우 컸다.


아무튼 결국, 5월 27일에 국민당 상하이 수비군이 투항했고, 7월 상순에는 저장성(浙江省) 전역을, 8월에는 푸저우(福州), 란저우(蘭州), 후난성(湖南省) 전역을 전투 없이 무혈입성 접수했다. 장제스는 국민당 본부를 난징에서 충칭으로 옮긴 후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1949년 12월 7일에 타이완으로 퇴각했다.




1949년 3월, 중공은 허베이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중공 제7기 2중전회를 개최하고 마오쩌동의 보고에 근거하여 전국적인 혁명 승리와 이 승리를 조직하는 방침을 제정하고 혁명 승리 후 건설할 ‘신민주주의’ 단계 정권의 청사진을 확정했다.


이 회의를 마치고 중공중앙은 지휘 본부를 최후의 농촌 소재 근거지였던 시바이포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했다.




마오쩌동은 베이징의 중난하이(中南海) 시설 정비 기간 중에 베이징 서쪽 향산(香山)의 별장에 임시 거주하면서 4월 21일에 인민해방군에게 장강 도하와 전국으로 진격 명령을 하달하고 이후 중국 대륙을 통치해 나가기 위한 다음과 같은 과제에 대한 구상을 했다.

⦁전국적 승리 획득 이후 당이 정치, 경제, 외교 방면에서 채택해야 할 기본 정책

⦁중국이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신민주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사회로 전변(轉變)하는 노선과 총체적 임무

⦁당의 공작 중심을 향촌에서 도시로 이전하기 위한 실행 전략과 이를 실행하기 위한 생산력 회복과 발전 임무를 담당해야 할 도시 관리와 도시 건설 전략

⦁도시 업무 추진 중에 노동자계급과 노동 군중을 단결시키고 당 밖의 민주 인사와 지식인을 아군으로 포용하는 전략





https://youtu.be/KpABySkJtxA


중국현대사 #중국공산당사 #3대전투 #랴오닝션양전투 #화이하이전투 #핑진전투 #유격전에서_공격전으로

                    



작가의 이전글 나, 아직 살아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