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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Jan 26. 2024

토지없는 자유는 노예의 자유

부동산공부(8),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

셔먼 장군(General Sherman)

William Tecumseh Sherman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 호]는, 1866년에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에 의해 불에 타서 침몰한 미국 상선이다. 

그런데 이 배의 이름 셔먼 장군(General Sherman; William Tecumseh Sherman)은 미국 남북 전쟁 당시 그랜트 장군과 더불어 전쟁을 북군의 승리로 이끈 사람이다. 그의 휘하에 흑인 병사 1만 명이 소속되어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셔먼 장군은 흑인 지도자들과 면담하면서 흑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유뿐만 아니라 토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흑인들에게 토지가 없는 자유는, 생계를 위해서 다시 토지를 가진 백인 지주에게 소작농으로 예속될 자유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종종 "항산(恒产)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

흑인들을 위해 셔먼 장군은 1865년 1월, 특별 야전 명령 15호를 통해, 각 흑인 가족들에게 조지아주 연안과 섬들에서 40에이커의 경작 가능한 땅을 주겠다고 발표했다. 또 당시 북군은 다수의 잉여 노새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노새들도 또한 흑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북전쟁 참전 흑인노예들

"땅 40 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40 Acres And A Mule)"의 소식은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흑인들은 그 소식에 열광, 환호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와 조지아에서 40에이커씩의 땅을 4만 명 이상의 흑인이 받았다. 미시시피의 데이비스 벤드(Davis Bend)에서는 거대한 면적의 몰수 토지가 1,800명의 흑인들에게 배분되었다. 흑인들은 자기들의 땅을 열심히 경작해서 상당한 수확을 거두었다. 


그러나 1865년 4월, 링컨 대통령이 암살당한 후 새 대통령이 된 앤드류 존슨과 의회의 다수 정치인들은 같은 해 8월, 아메리카 합중국의 재건이라는 명분하에 그와 관련된 모든 명령들을 폐지해 버렸다. 

전쟁이 끝나고 자유를 얻은 남부의 400만 명의 흑인들은 이제 원하는 곳으로 갈 수는 있었지만, 땅이 없었다. 


셔먼 장군을 비롯한 급진 공화당파는 비록 의회 내 소수파였지만, 흑인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없는 정치적 자유는 진정한 자유가 되지 못하며, 백인 지주들이 다양한 지방법을 근거로 삼아 흑인들을 다시 경제적으로 속박하고 결국 인산상의 자유까지도 속박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급진 공화당파는, 긴 세월 동안 흑인 노예들이 땅을 경작해왔기 때문에, 그 노예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차원에서, 흑인들이 땅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부의 토지 문제에 대한 의회 토론에서, 결국 의회는 흑인들에게 토지로 보상하자는 특별 조치 제안을 거부했다. 

의회 내에서 토지를 흑인들에게 주자는 방안에 지지하는 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다수의 반대자들은 흑인들의 정치적 권리를 보호해 주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정치적 권리들이란 투표권, 재산소유권, 공무담임권 등으로서 수정헌법 13조, 14조, 15조에서 보장된 것들이었다. 

결국 흑인들은 토지를 받지 못하였다. 흑인들은 다시 백인 지주의 소작인이 되어 수확물의 50%를 바치는 신세가 되었다. 빈궁과 빈곤은 필연이었다. 

흑인 노예들

반면 백인 농장주들은 과거 노예제도하에 있을 때 보다 더 좋은 상황이 되었다. 

노예제도 하에서는 흑인 노예를 재산으로 보았기 때문에 노예가 굶거나 병들면 재산상의 손실을 피하기 위해 먹을 것을 주고 치료를 해주었는데, 이제 더 이상은 그럴 필요가 없게된 것이다. 

부리고 있는 흑인 소작인이 굶어 죽든 병들어 죽든, 소작인이 될 수밖에 없는 다른 흑인 예비군들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헨리 조지는 『진보와 빈곤』에서 이렇게 통찰했다. 


“노예제도가 철폐된 지금 남부의 농장주들은 아무 손실도 입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노예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살아야 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면 전과 다름없이 노동을 지배할 수 있는 동시에 노동에 대한 책임은 - 때로는 대단히 비용이 많이 드는 책임은 -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앤드류 존슨 대통령령에 의해, 많은 흑인들이 영원히 자신들의 것이 될 것이라고 믿었던 땅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그들에게는 백인 소유의 대농장에서 소작농 노동자로서 일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에 따른 깊은 배신감과 상처가 있었고, 그 배신감의 표출은 당시 미국의 재건 시기를 통해, 그리고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3대 흑인 배우 덴젤 워싱턴, 새뮤얼 엘 잭슨, 웨슬리 스나입스는 모두 흑인 저항 운동의 지도자이자 영화감독인 스파이크 리(Spike Lee)와의 작업을 통해 그 연기력을 인정받으며 대형 스타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스파이크 리의 영화제작사 이름이 바로 ‘땅 40 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40 Acres And A Mule)이다. 

이것은 스파이크 리와 같은 예리한 흑인 운동의 지도자들이, 현재 미국 사회에 남아 있는 실제적인 흑인 차별과 흑인 빈곤 문제의 근원을, 과거 남북전쟁 당시 토지를 흑인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가, 그후 그 약속을 뒤집어버린 백인들의 배신이라 규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미국 남북 전쟁 때 전사한 남군 병사를 가족으로 둔 남부 백인 여성이, 주위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북군 전사자의 무덤에도 꽃을 심어주겠다고 말하는 장면은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숭고한 화해도 결국 흑인들을 배제한 백인들만의 화해일뿐이다. 

이 소설에는 북군이 남부를 진격하면서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흑인들에게 "땅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씩 나눠 주겠다"는 발표도 나온다. 그러나 얼마 후 백인들은 그 약속을 뒤집어 버린다. 

그 이유는, 북부와 남부의 백인들의 화해를 위해서였다. 남부 백인의 땅을 흑인에게 주면, 북부 백인과 남부 백인의 화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명분이었다. 하지만 백인들의 배신에 큰 상처를 받은 흑인들의 입장에서 화해는 ‘그들’(백인들)만의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땅 40 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가 주는 역사적 교훈은 바로 “토지가 없으면 자유도 없다!”(No Land, No Liberty!)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 희년법에 담긴 그리스도교 사회사상이기도 하다.

농장의 흑인 노예들

토지와 자유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 동족 히브리인은 노예로 부릴 수 없고 머슴으로만 고용할 수 있는데, 만약 희년에 머슴이 자유를 얻어 자기 고향집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자기 기업인 토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그는 다시 누군가의 집에 들어가 머슴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토지를 회복하지 못하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토지가 없으면 자유도 없는 것이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반드시 토지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희년법은, 전국 거주민(居民)에게 자유를 공포하라고 선언한 다음 바로 각각 그 기업된 토지를 회복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를 띠건 노예제도는 모두 토지에 대한 평등한 권리가 부인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어떤 히브리 사람이 타인의 불의한 강탈에 의해 자기 몫으로 받은 토지를 잃게 된다면, 그는 유랑하는 떠돌이가 되거나 타인에게 고용되는 머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 자신과 미래 자손들이 희년이 오더라도 자기 소유 토지를 회복하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영원한 머슴, 곧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토지에 대한 상실은 자유에 대한 상실을 의미하며, 토지 사유제는 노예 사유제의 근원인 것이다. 이는 헨리 조지의 주장이기도 하다.


우리도 종종, "항산(恒产)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여기서 항산(恒产)은 영원한 또는 변함없는 재산, 즉, 부동산(不动产) 또는 방지산(房地产: 중국에서는 주로 이 용어를 사용함)이고, 바로 토지를 가리킨다. 따라서, 항심(恒心)을 유지하고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항산(恒产), 즉, 토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위 인용 글에  제기된 문제와 연관하여 토지 소유제에 대한 대안으로 '토지 국유제'를 주장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제대로 민주화가 되지 않은 상태의 국가나 사회에서, 권력이 어느 특정 무리(정당)나 개인에게 장악, 독점되어 좌지우지 되고 있는 상태에서 토지가 '국유화'된다면, 그 체제하의 인민(국민)은 그 독재자 집단의 노예, 즉, 국가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개인의 자유과 권리, 인권의 신장이라는 관점에서 역사적 흐름을 보아도, 토지의 국유(왕유)보다는 사유권이 강화되고 확대되는 흐름이 '진보'의 방향이고 흐름이 될 것이다. 


단, 토지국유제 하에서 주요 모순, 그리고 그에 대한 대안은, 국가(왕실)에 대한 귀족 지배계층간의 토지사유권 강화와 확대가 핵심이었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소수의 귀족계급에게만 한정되긴 했지만, 개인 자유와 인권 폭을 넓히는 방향으로의 변화의 시작이었다고 힐 수 있다. 


그러나, 또 다시 덧붙이자면, 토지사유제가 강화, 확대되는 흐름 속에서는 귀족, 지배계층의 일반 민중(백성)에 대한 토지 약탈(겸병)과 착취에 따른 모순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그로 인한 갈등과 토지-부동산 문제는 산업사회와 정보화 시대인 오늘에 까지도 이어 지고 있다. 그 같은 문제에 대한 구조적 진단과 실사구시(实事求是)적 처방을 탐색하는 것이 부동산 공부를 하고 그 내용을 정리하여 연재하는 목적이다.  


* 위 글은 다음 글을 일부 수정하고 뒷부분에 필자의 의견을 보완한 것임.

 박창수, 2007. “헨리 조지의 기독교 사상(4) 토지와 자유”, <기독교 사상>,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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