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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성 Jan 25. 2024

중공, 베이징 입성

중국현대사(25)

1949년 초, 중공은 국민당과의 제2차 국공내전에서 승세를 굳힌 후, 국민당 수도 난징(南京)을 점령하고, 장제스의 국민당을 타이완으로 쫒아내고, 원(元), 명(明), 청(清) 왕조의 수도였던 베이징에 입성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1921년 7월에 상하이와 저장성(浙江省) 자싱(嘉兴)의 난후(南湖) 호수상의 배 안에서 국민당 밀정의 감시 눈길을 피하면서 창당대회를 했던 때로부터 불과 27년여 만이었다.

허베이성 핑산현 시바이포촌

마오쩌동을 포함한 중공중앙의 서기 5인(마오쩌동, 주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런비스)과 영도 간부들이 중공 최후의 농촌 소재 중앙사령부가 있었던 허베이성 핑산현(平山縣) 시바이포촌(西柏坡村)을 떠나 베이징으로 출발한 날은 1949년 3월 23일이었다.

 

그 전 1월 31일에, 인민해방군이 베이핑(北平, 현 베이징)에 입성, 접수한 후, 중공중앙은 3월 5일에서 13일까지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중공 7기 2차 중앙위원 전체회의(中共七届二中全會)를 개최하고, “당의 공작 중심을 향촌에서 도시로 이전한다”라고 선포하고, 중앙 사령부와 정부의 베이징으로 이전한다고 결정했다. 즉, 신 정권의 수도를 베이징으로 정한 것이다.

홍색 관광지로 조성된 시바이포

1949년 3월 21일 새벽, 이전 작업 지원을 위해 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정치부 보위부장 첸이민(錢益民)과 사령부 작전과장 인젠(尹健)이 100대의 대형 트럭, 20대의 중소형 지프차와 함께 각각 베이징과 톈진에서 시바이포로 왔고, 그 이틀 후인 3월 23일 오전에 11대의 지프차와 10대의 트럭으로 구성된 차량 대열이 시바이포를 출발하여 산간 도로로 베이징을 향해 동북 방향으로 향했다.


차량 대열의 선두에 길 안내 소형 지프차, 그 뒤에 마오쩌동이 탄 중형 지프차와 그 뒤로 마오의 가족이 탄 지프차, 이어서 류샤오치가 탄 작은 침대차(小卧車)와 류샤오치 가족이 탄 중형 지프차, 이어서 저우언라이가 탄 중형 지프차, 주더, 런비스, 루딩이(陸定一), 후차오무(胡喬木, 1912~1992년), 예즈롱(叶子龍) 등이 탄 지프차, 그리고 그 뒤로 5대의 트럭에 소수의 기관 공작 인원과 화물, 그리고 또 다른 5대의 트럭에 중앙 경위단의 권총 연대와 1개 보병 소대가 타고 그 뒤를 따랐다. 그날 새벽에 일부 기관 공작 인원들이 연도 준비 공작을 위해 선발대로 출발했다.


이렇게 시바이포를 출발한 중공중앙의 차량 대열은 당시 허베이성 정부 소재지였던 바오딩(保定)에서 중공 허베이성 위원회 서기 린톄(林鐵)에게 중공이 새로 접관하게 된 도시 공작 관련 문제점에 관한 보고를 듣고, 줘저우(涿州), 펑타이를 거쳐서 베이징 서북부 교외 이허위안(頤和園)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고, 3월 25일 오후 5시에 시자오(西郊)공항에서 베이징 입성 열병식에 참석한 후에, 노동자·농민·청년 대표와 각계 민주 인사들을 만나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임시 주둔지로 정한 향산(香山)으로 향했다.

경호대장 리인차오(李銀橋)와 마오쩌뚱

시바이포에서 베이징으로 출발하는 그날 아침에 마오쩌동이 감회에 젖어서 경호대장 리인차오(李銀橋), 그리고 경위병들과 함께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마오: 언젠가는 승리하고 베이징에 가기는 꼭 갈 것이라 생각했다. 단, 이렇게 빨리 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너희들은 예상했나?


리인차오: 옌안에서 철수할 당시 주석께서 장제스를 깨부수는 데 앞으로 3년에서 5년은 걸릴 것이고, 5년 안에 그렇게 할 수만 있어도 꽤 괜찮은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불과 2년 만에 베이징에 들어가리라고는 저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마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감개무량한 어투로) 나도 승리가 이렇게까지 빨리 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도 장제스는 더 그랬을 것이다.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간 후에 그는 그의 미국 상전에게 돈과 물자, 신식 무기, 그리고 군함, 자동차, 열차, 비행기를 요청했고, 3개월에서 6개월 안에 중국 대륙에서 공산당을 소멸시키겠다고 장담했다. 그 후 그는 내전을 발동하고 매일 우리를 소멸시킬 궁리만 했으나 오히려 우리에게 소멸되었다. (잠시 말을 멈춘 후 더욱 감격에 겨운 어투로) 그들은 우리보다 병력도 많았고 무기도 보급도 모두 압도적으로 좋았다. 우리는 먹을 것과 입을 것조차도 부족했고, 보장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우리를 멸하지 못했고, 오히려 우리에게 패배했다. 이것의 원인이 무엇일까? 어떤 오묘한 이유라도 있는가? 사실 도리는 매우 간단하다. 인민이 장제스가 일으킨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계속 잔혹하게 인민을 착취하고, 핍박하는 것에 인민들이 반대하고 반항했다. 결국 인심의 향배가 우리의 승리와 장제스의 패배를 결정했다.   


시바이포를 떠나서 베이징으로 출발 준비를 하는 사이에 마오쩌동은 수차례 리즈청(李自成)이 실패한 교훈을 거론했다. 즉, 베이징에 진입한 후에 절대로 리즈청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겸손·신중해야 하고 결코 오만해선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리즈청은 명말청초(明末清初)의 농민 봉기군 우두머리로 봉기군을 이끌고 베이징성을 점령하고 명 왕조를 뒤엎었다.  

리즈청(李自成)

          

리즈청의 농민 봉기군은 베이징성 입성 전에는 기율(紀律)이 매우 엄정하고 분명했다. 리즈청은 봉기군 장병들이 군영(軍營) 내에 백금을 숨기는 걸 금했고, 도읍지를 지날 때는 민가에 기거하지 못하게 했다. 부녀자 겁탈을 군령으로 금지했고 아내 외에는 부녀자를 데리고 다니지 못하게 했고, 군율을 어길 시에는 참수했다.


그러나 베이징 입성 후에는 승리 후의 환락에 빠져들어서 추상같던 기율이 해이해졌다. 장군들은 약탈을 위해 명조의 고관과 부호들에게 폭행·고문·살인을 빈번히 자행했고, 병졸들도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했다.

그 결과 베이징 입성 한 달여 만에 민심이 변하고, 군대는 향락과 색욕에 빠져서 다시 전쟁을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청군(清軍)이 산하이관(山海關)으로 공격해 왔을 때 리즈청이 친히 지휘하여 대항했으나 패배하고 베이징성에서 퇴각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행된 결정적 요인 중에는 당시 명왕조의 장수로서 산하이관을 지키고 있던 우싼구이(吳三桂)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우싼구이는 명왕조는 이미 멸망고, 베이징을 점령한 리즈청의 농민 봉기군 세력이 자신의 아버지와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에서 봉기군 세력에게 투항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중에, 리즈청의 심복 장수인 류종민(劉宗敏)이 자신의 애첩 천위안위안(陳圓圓)을 취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산하이관 성문을 열어 장성 밖에 진치고 있던 청나라 군대를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이들 만주족 군대와 연합해 리즈청의 봉기군을 격파함으로써 베이징과 한족 왕조를 만주족 청조에 넘겨주었던 것이다.


마오쩌동은 중공 7기2중전회 보고에서 당내의 기고만장하고, 공을 다투고, 다시 간난한 생활을 원하지 않는 정서를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산계급 부패 사상에 의한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당의 영도 간부에게 아부하지 말고, 선물 보내지 말고, 술잔 올리고(敬酒) 박수 치는 것조차도 자제하고, 지명이나 도로, 기업의 이름에 당의 영도 간부 이름을 넣지 말고, 또한 그들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스탈린과 같은 줄에 세우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마오쩌동의 지시는 6개조의 규정으로 작성되었다. 마오는 “우리는 베이징에 시험 치러 간다. 이 시험에 기필코 합격, 통과해야 한다”라고 되풀이 강조했다.   


#베이징입성 #리즈청李自成 #천위안위안陳圓圓


https://youtu.be/gIlfiHwcq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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