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왕조 국가의 토지 왕유제(王有制)하에서, 토지사용권은 대부분의 왕유(王有) 토지는 물론 사유지 성격이 강한 일부 토지도 강력한 국가소유권의 제한과 통제를 받았다. 국가가 모든 경제 요소의 우선적인 결정자, 지배자, 수익자였으므로, 농민의 토지사용권은 국가토지소유권의 부속된 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주(西周) 시기에는 원시사회 농업공사의 토지가 점진적으로 공사 구성원의 주요한 생산자료가 되었고, 갈수록 그 사용 기간이 길어지면서, 농민들이 매우 단순한 형태로나마 농지의 사용권과 사유화 개념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같은 개념을 맹아로 토지 국유제(왕유제)하에서 농민의 토지사용권의 분리와 사유화가 진행되었고, 다시 토지소유권의 사유화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지의 소유권과 사용권의 관계에도 더욱 다양한 형태로 큰 폭의 변화가 발생했으나 결국에는 토지사용권에 대한 보장이 더욱 장기화·안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또한 소유권의 사유화가 진행되면서 왕유(王有) 토지의 사용권도 점진적으로 사유화되었다.
한편, 서주의 분봉제(分封制)는 국가 소유권의 절대적이고 주도적인 지위를 의미한다. 즉, 제후의 점유권을 통해 국가 토지소유제와 농민의 경작행위 간의 권리관계가 연결 및 체현되었다.
제후는 자신의 영지 내의 토지를 수하 관리인 ‘경(卿)’이나 ‘대부(大夫)’에게 분배해주는 ‘준처분권’을 행사했지만, 토지에 대한 최종 지배권이 국가에 귀속된 상황은 바꿀 수 없었다.
즉, 제후는 국가의 대리인 역할을 했을 뿐이며, 분봉(分封)행위는 토지 소유권 행사주체의 등급을 구분한 것에 불과했다.
과세제도
3대 시기의 과세제도
과세제도(赋税制度)는 국가의 존재 기초이고, 토지제도의 중요한 내용이다. 하·상·서주(西周) 시기에 정전제(井田制)의 기초 위에서 세 종류의 서로 다른 과세제도가 채택되었다.
첫째, 원시사회 말기에 공사 구성원이 공사집체(公社集体) 또는 그 대표자에게 납부하는 공납(贡纳)으로, “공(贡)”이라 불렀다. 이는 실물지대이고, 세율은 수확량의 1/10이었는 데, 이는 과거 수년간의 평균 수확량을 기준으로 했다.
둘째, 노동지대(劳动地租)인 “조(助)”로서, 농부가 70무(亩)의 사전(私田)을 취득해 스스로 경작할 경우에는 1/10의 노동량을 공전(公田)을 경작하는 데에 제공해야 한다. 즉, 노예주를 위해 노역을 제공해야 한다.
셋째, 주(周)대 사람들이 채택 및 시행한 것으로, 쌍궤제(双轨制)인 ‘철법(彻法)’이라고 해석되는 “철(彻)”이다. 즉, 도시(城邑)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공법(贡法)’을 채택 및 적용했고, 교외지구(郊区)에 거주하는 자에게는 ‘조법(助法)’을 채택 및 적용했다. 즉, “공(贡)”, “조(助)”, “철(彻)” 3법은 결국 예외 없이 양대 유형인 노동력과 곡물지대 착취이며, 그 착취 비율은 총체적으로 1/10의 범위 안에서 정해졌다.
춘추전국 시기의 과세제도
춘추전국 시기에는 정전제(井田制)가 와해되고 봉건생산관계가 발생했으며, 이와 함께 각국의 통치 계급은 각각 과세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기에는 각국이 토지사유를 승인하고, 농지면적에 따라 납세했으며, 동시에 전쟁 수요에 부응해 농지세(田赋)·병역(军赋)·노역(力役) 징수의 정도가 보편적으로 증가했다. 이 같은 과세제도의 실시는 인민의 부담을 극심하게 가중시켰다.
토지사유제 맹아 시기
춘추전국 말기부터 시작해, 위진남북조 시기까지, 약 600여 년간을 일반적으로 토지사유 시기라고 부른다. 전국 시기의 토지제도는 위에서 소개했으므로, 이하의 설명에서는 진, 한, 삼국, 그리고 양진(两晋) 시기의 토지제도에 초점을 맞춘다.
진·한 시기의 토지제도
진·한 시기는 중국 봉건사회의 형성 시기로, 토지사유제가 확립되고 공고히 다져졌다. 봉건토지소유제 구조의 세 가지 기본 형식은 봉건국가 토지소유제, 지주 토지소유제, 그리고 자경농 토지소유제이다.
지주계급과 농민계급이 봉건사회의 양대 대항 계급을 구성했다.
봉건국가의 정치 권리와 토지소유권은 분리되어 있었으며, 지대(地租)와 국세(国税)도 분리되어 있었다.
토지 사유화 및 토지매매와 함께 토지겸병(兼并)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봉건국가는 토지겸병을 억제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토지사유제의 확립
춘추전국 시기 말기에 토지매매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날로 흥성하는 상품화폐 관계는 정전제(井田制)를 와해시키고, 토지겸병과 토지사유제(私有制)를 탄생시켰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이미 각 계층이 실제 점유한 토지를 몰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기원전 216년에 진조(秦朝)는 법령을 공포해 지주 스스로 자신이 소유한 토지면적을 보고하도록 하고, 규정에 따라 세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이는 토지소유권 취득이 가능하고, 그 소유권은 국가 법률의 승인과 보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서한(西汉) 초기에 이르러서는 토지 사유제가 광범위하게 확산·발전했다. 국가가 대량의 국유 토지를 각 계층에게 분배하고, 국가정권 역량을 통해 토지 사유화를 촉진시켰으며, 이에 따라 토지매매가 보편화되었다.
공전과 사전의 병존
진대(秦代)의 토지제도는 국유토지와 사유토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국유(왕유) 토지는 봉건국가의 정부가 직접 경영하는 토지로, 일반적으로 관전(官田) 혹은 공전(公田)이라 불렸다. 이 밖에 아직 개인(私人)에 의해 개발 또는 점유되지 않은 산림, 하천, 호소, 개간되지 않은 초지(草地)와 황무지도 모두 봉건 관부(官府)의 소유였다.
사유토지는 민전(民田) 또는 사전(私田)이라고도 불렸다. 사유토지는 다시 지주 사유와 소토지 소유(小土地所有)의 두 형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양한(两汉)의 봉건토지제도는 기본적으로 진의 토지제도를 계승·발전시킨 것이었다.
토지겸병과 한전(限田)의 출현
계층의 분화와 자유매매 토지제도는 결국 토지분배의 불균형과 토지겸병을 야기했다. 한대(汉代)에 이르면 토지겸병은 갈수록 극심해져서, 농민과 지주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과중한 조세 부담 등 수탈로 인해 파산해 토지를 포기하고 도망했으며, 이들 굶주린 유민(流民)들이 봉기해 정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일이 빈발했다.
농민봉기
농민 봉기(农民起义)의 원인은 전국시대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시대부터 한조(汉朝)까지 토지의 자유매매가 가능했고, 농민은 세금을 내야 했다. 이 같은 상황 속에 토지겸병이 성행하면서 지주가 소유하는 토지는 갈수록 늘어나고, 토지를 잃고 유랑하는 유민이 갈수록 증가하는 양극 분화(两极分化)가 진행되었다.
굶주린 유민들은 봉기해 정부를 공격 약탈하게 된다. 이 같은 상황이 극심했던 때가 동한(东汉) 시기이다.
동한 안제(安帝) 때부터 농민 봉기가 빈발해, 역사에 기록된 대규모 봉기만 40여 회 일어났으며, 초기의 4~5천 명에서 영제(灵帝) 시기 황건적 봉기(黄巾起义) 때는 봉기군의 수가 백만 명에 달했다.
동한 말기에는 황건 봉기군 외에도 백파(白波), 흑산(黑山) 등 수많은 유랑민 봉기군 단체가 허베이(河北), 중원(中塬) 등지에 분포하고 있었다.
유민과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할수록 농민에 대한 조세 압력은 더욱 가중되었고, 이는 다시 유민의 증가를 초래했다. 식량 생산이 줄어들면 굶주린 유민들의 봉기 횟수와 규모가 다시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한편, 유민 중 일부는 생존을 위해 지방 호족의 가노(家奴)나 병졸이 되기를 자청했다. 지방 호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정부 관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토지를 차지하고 무장하며 왕이라 칭하는 지방 호족이 늘어났고, 이들이 할거하는 국면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왕조의 경제 기반인 조세 수입이 줄어들면서 왕조는 쇠망(衰亡)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 사유화와 토지겸병이 야기하는 문제에 대응하고자, 동중서(董仲舒)는 한무제(武帝)에게 “개인이 점유하는 토지 수량을 제한하자(限民名田)”고 상소했으나, 구체적인 제한 면적 기준 등을 함께 제시하지 못했고, 그 결과 채택되지 않았다.
이후 한 경제(哀帝)의 스승인 스단(师丹)이 정전제(井田制)를 모델로 해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한전(限田) 건의를 수차례 올려 채택되었다. 한서(汉书) 「식화지(食货志)」에는 제후, 열후(列侯), 공주 등을 대상으로 한 구체적인 토지면적 제한 방법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농지 제한 방법은 귀족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에는 실현될 수 없었고, 토지겸병은 더욱 극심해졌다.
왕망(王莽) 시기에도 지주와 농민 간의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구상과 건의가 제출되었으나, 역시 귀족과 부호들의 반대로 실현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