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인성 Jan 09. 2024

중국, 고대 및 근대 토지제도(1)

중국부동산공부(5)

광활한 토지와 장구한 역사적 경험을 축적한 중국 대륙에서는 각 왕조 시기마다 토지의 소유와 사용을 둘러싼 국가권력과 인민 간의 관계 속에서 얽히고 설킨 모순과 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중국 고대부터 중국공산당 창당 이전까지의 각 왕조, 그리고 민국(民国) 시대와 항일전쟁 시기의 토지제도와 사상을 국유제 쇠락과 사유제 확대, 그리고 토지사용권의 분화 및 사유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 정리했다.


토지제도는 인류의 군집 거주 형태인 씨족이나 국가가 공동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그 구성원 각자의 토지사용으로 인해 건립된 각종 권리관계를 확정한 것이며, 그 '각종 권리관계'의 주요 내용은 토지소유권을 둘러싼 각종 권리와 또 그들 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토지제도는 토지사용 중에 건립된 종종의 권리관계를 주요 내용으로 하므로, 토지제도사(土地制度史)는 응당 권리관계 형성 및 변화 과정 연혁을 근거로 구분해야 할 것이다. 즉, 전체 토지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제도는 토지소유제이므로, 토지제도사에 대한 고찰과 분석도 토지소유제와 생산관계 간의 역사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중국의 고대 및 근대의 역사 발전 과정은 대략 3개 시기로 구분수 있다.

첫째, 씨족부락 시기로, 이는 다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씨족부락(氏族部落)이 각지에 분산 거주하던 시기이고, 후기는 대규모 씨족부락이 점차 발전해 힘이 센 자가 지배 권력을 장악하고 왕초, 두령, 왕(王)으로 불리며 군림하게 되면서 인민들 간에 계급과 종속 관계가 발생하는 시기이다.

둘째, 봉건 시기로 주로 주대(周代)에 시작해 춘추전국(春秋战国) 시기에 끝났다.

셋째, 관료정치시대로, 진조(秦朝)부터 민국(民国) 시기까지, 그리고 민국 이후의 시기를 포함한다.


토지소유제의 관점으로, 신중국 성립 이전까지의 시대 범위 안에서 보면, 중국의 고대와 근대의 전체 시기를 다음과 같이 5개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토지 공동소유(共有) 시기로 원고(远古)시대인 하(夏)대 이전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수렵과 유목 생활의 필요에 따라서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다니며 살았고, 토지는 부족 전체 공동소유했다.

둘째, 토지의 국가 소유, 즉 공유(公有) 시기로, 하(夏)·상(商)·주(周) 3대부터 시작해, 춘추전국 시기 말기까지 1700여 년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국가가 건립되었고, 국가로부터 정전제(井田制)에 의거해서 국유 농토를 분배받고, 경작에 종사하고, 사후에 관(정부)에 반환하는 제도가 자리 잡았고 인민들도 그에 익숙해졌다.

셋째, 토지사유제의 맹아(萌芽) 시기로서, 춘추전국 시기부터 시작해 진(秦)·한(汉)을 거쳐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기 전후까지로, 약 830년간이다. 이 시기에는 국가가 농지를 분배하고 반환하는 방식의 제도는 이미 붕괴되었고, 개인이 토지를 자유롭게 매매할 수 있었다. 따라서 “부자의 밭은 천백리까지 이어지나, 가난한 자는 송곳으로 찌를 땅도 없다”는 상황이 되었다.


넷째, 토지공유제 회복 시기로, 남북조(南北朝)부터 수(隋)·당(唐) 시기까지이다.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부터 시작해 북제(北齐)와 북주(北周)를 거쳐서 당(唐) 중엽까지는 주대(周代) 이전의 체제를 모방해 시행했고,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에 농지의 지급과 환수에서 균전제(均田制)까지 약 260여 년간 시행되었다.


다섯째, 토지 사유제 확립 시기로, 당 현종 천보(天宝) 때부터 안사(安史)의 난 이후 균전제가 붕괴되었고, 송(宋), 원(元), 명(明), 청(清)을 거쳐 민국(民国)이 설립될 때까지의 1200여 년의 기간이다.



한편, 농촌과 달리 도시에서는 토지가 경작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중국 봉건사회의 도시는 주로 당시의 봉건통치계급의 통치행위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수공업의 발전에 따라 경제, 상업, 문화,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주로 황실, 귀족, 사병 등 봉건통치와 관련된 자들과 공상업자와 일반 평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봉건국가의 도시토지는 주로 3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국가 소유 토지로, 궁전, 궁묘, 병영(兵营) 등의 건축용지를 포함한다.

둘째, 공상업자 및 개인 소유의 토지로, 공방(工房), 상점 및 공상업자의 가족, 노동자들의 거주용지를 포함한다. 도시의 공상업은 농촌의 기초 위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도시의 공상업과 농촌의 농업은 내생적으로 연결되었다. 도시의 많은 공상업자는 동시에 농촌의 지주였으므로, 이들이 방대한 도시토지와 공방과 상점도 소유하고 있었다.

셋째, 도로, 사찰, 교회 및 기타 공공건축용 공공용지이다.


1840년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해 대량의 토지를 강점하면서 몇몇 도시는 통상항구로 개방되었고, 시구(市区) 내에 외국 조계(租界)가 설립되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도시 발전했다. 특히 도시 공상업의 발전과 함께 비농업용 용도 도시토지의 확산을 촉진했다.

둘째, 농촌경제의 파산과 농민의 분화를 가속시켰다. 일부 농민은 토지를 방치하고 도시의 산업노동자가 되었으며, 그중 일부는 도시 빈민계층이 되었다.


 

셋째, 도시는 외국의 침략세력이 경제 약탈과 문화 침략을 진행하는 거점이 되었다. 제국주의자는 약탈 수단을 통해 도시토지의 일부를 장악하거나, 혹은 외국 자본 세력을 내세워 저가 수매 등의 방식을 통해 도시토지를 점유했다.


* 출처: 박인성.조성찬, 2018. '중국의 토지정책과 북한', 한울아카데미, 19-22쪽


                    



작가의 이전글 제3신당, 성공을 바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